자유게시판
내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사람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성태
작성일
2024-03-01 00:38
조회
300
언제였더라. 처음 배구를 접했을 때가. 아마 10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쭉 수원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며 당연히 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이제 막 여름이 저물어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에 마주했던 서울은 그때의 내가 느끼기에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 같았다. 수원도 워낙 큰 도시라고 생각했고, 같은 수도권인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냐고 무시하던 내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차로 한 시간이면 들어올 수 있는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뭔가 달랐다. 흘러가는 공기와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유독 매서웠다. 타지인이라고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꼈었다. 아무튼 갓 서울에 들어왔을 때 나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는말이다.
전학 온 첫날, 나는 정말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기만 했다. 요란한 자기소개로 관심이나 끌어볼까 하다가 그럴 성격이 못되어서 그만 뒀다. 그래도 전학생이라고 주변 친구들이 스멀스멀 다가와 말을 건내줬었다.
그 때, 그 많던 아이들 사이로 눈에 띄게 밝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고작 열 살이었지만 누가 봐도 ‘나 운동선수에요’하고외치던 몸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여자였는데도 나랑 비슷할 것 같은 키에 길쭉길쭉한 팔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었다. 그게 그 아이의 첫 인상이었다.
혼자 너무 밝게 빛나고 있길래 처음엔 말도 못 걸고 바라 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재미가 없어졌는지 다들 자기들끼리 모여 되돌아가는 아이들 사이에 서서 그 아이만 날 향해 계속 웃고 있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지금도 생각날 만큼 바보같이 대답했었다. 말도 엄청 더듬고, 발음도 꼬여서 세 번 넘게 내 이름만 물어봤었다.
“아, 박성태? 나는 문아영이야. 친하게 지내자! 사실 나도 전학생이거든.”
세 번이나 물어봤어도 이름을 잘못 부르던 것 때문에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때는 내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진짜?”
“응, 진짜. 근데 너도 운동선수야?”
“어? 아니?”
갑자기 운동선수냐는 말에 당황해서 삑사리까지 났었다. 아영이는 소리 내어 몇 번 웃더니 키가 엄청 크길래 당연히 운동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며 키가 아깝다는 이야길 했다. 평소에도 키 때문에 운동을 해보라는 말을 수 없이도 들었던 나이기에 아영이의 말이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 만 보고 있자 아영이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배구 선수가 꿈이야! 그래서 여기로 전학 왔어.”
“우와, 멋지다.”
배구가 뭔지도 모르고, 전학이랑 배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그저 부모님이 서울로 오자 길래 그러자고 했고, 전학을 가자 길래 그러자고 했을 뿐인데 아영이는 아니었다. 온전히 자신의 꿈을 위해 환경을 바꾸어냈다. 거기서 나와는 다른 아영이에게 존경심 엇비슷한 감정을 받은 것이다.
그 날, 그새 아영이와 친해졌던 나는 아영이를 따라 배구부 훈련이 있던 체육관에 놀러 갔다. 아영이는 내게 잠깐만 기다리라 더니 금방 옷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와서는 환히 웃으며 내게 자랑했다.
“어때? 멋지지! 이번에 새로 받은 유니폼이야.”
아영이가 뒤를 돌아 자신의 이름과 등 번호를 가리켰다. 기분 탓이었는지 햇빛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A. Y. Moon’이라는 이니셜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넋을 놓고 유니폼만 바라보고 있자 아영이가 다시 날 바라보며 서고는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15번인데, 이번에 처음 들어와서 그렇대. 나중에 실력이 늘면 번호도 점점 작아질거야!”
“그럼 넌 지금 15등인거야?”
“응, 그치. 물론 15명 중에 15등인거지만.”
“꼴찌네.”
“지금은 꼴찌지! 나중엔 내가 1번 할 거야.”
장난삼아 던진 말에 아영이는 잠깐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다짐했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참 예뻐 보여서 괜히 핀잔을 주려 던 참에 체육관 끝에서 코치님으로 보이는 선생님이 아영이를 불렀다. 아영이는 내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잘 구경하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께 달려갔다. 나는 아영이의 말에 순순히 체육관 가장자리에 기대 앉았다. 배구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영이가 배구를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아영이는 배구부원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한동안 몸을 풀며 스트레칭을 하고 체육관을 몇 바퀴씩 내달리더니, 슬슬 지루해질 즈음에 코트에 섰다. 아까는 아영만 보느라 다른 부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열 두 명의 부원이 코트를 가득 채우고 서있는 모습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같은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었다. 모두들 진지한 얼굴로 공을 주시하며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점수를 따거나 지켜냈다. 그 순간 만큼은 어른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기개를 모두가 지니고 있었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공을 바닥에 내리 꽂고는 포효하는 아영이를 보자마자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연습 경기가 끝나자마자 아영이는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 밤 늦게 까지 계속 연습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바라봤을 때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기, 다음에도 보러 와도 돼?”“당연히 되지! 꼭 놀러 와!”
아영이는 내가 체육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걸 바라보며 뒤를 돌아 밖으로 나올 때,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나도 아영이랑 같이 경기를 뛰고 싶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당연하게도 왜 이렇게 늦었냐며 엄마께 꾸중을 들었다. 그때 아랑곳 않고 엄마께 바로 말씀드렸던 것 같다. 배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엄마는 잠깐 놀라신 듯 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그러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어보시길래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모조리 말씀드렸다. 아영이를 만난 일부터 체육관에서 나올 때 들었던 생각까지 전부. 엄마는 가만히 듣고만 계시다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활짝 웃으며 초등학생도 배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배구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듯 했다. 고작 연습 경기를 딱 한 번 봤을 뿐이고, 다음 주면 그새 배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그만두고 싶어할 거라며 나를 다그치시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 충동적이긴 했다. 나도 다음 주의 내가 여전히 배구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주저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아빠와 함께 조건을 제시하셨다. 다음 달이 되어서도 배구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때 가서 배구를 배우게 해주신다고. 당연하게도 나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 이후부터 거의 매일같이 아영이를 따라 우리 학교 배구부가 훈련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켜보다 오곤 했다. 나중에 가서는 학교가 끝나면 아영이와 함께 체육관에 가는 게 당연해질 정도였다. 이미 반 친구들과 친해져 있던 아영이와 붙어다니면서 같은 반 친구들과도 빨리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배구부 훈련을 구경한 지 꼬박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배구를 배워보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있었다. 배구부 코치님이 날 알아보고 몇 번 기본기 훈련에 끼워주실 정도였으니 내 주변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말 만으로는 내 열정을 보여드리기 힘들 거라고 판단해 우리 학교 배구부 코치님과 함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은 내가 부탁 드린 대로 배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이이니 한 번 배구를 배우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고, 엄마는 한참을 웃으시더니 내게 전화를 바꿔 당장 배구 학원을 알아보러 가자고 하셨다. 그 때에 나는 너무 기뻐 몇 번이고 코치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아영이도 그 소식에 같이 기뻐 해주며 너도 꼭 등 번호가 9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내가 배구를 시작할 무렵, 아영이는 벌써 여섯 계단이나 올라서 있었다.
그 뒤로 배구단을 찾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초등학생도 들어갈 수 있는 배구단은 당연히 흔치 않았고, 엘리트 배구부가 아닌 취미로 하는 배구단을 찾다보니 남는 건 시에서 관리하는 리틀배구단 뿐이었다. 겨우 찾았던 리틀 배구단에도 지금은 자리가 없다는 말로 거절 당하다 예비 3번을 받고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한 해가 넘어갔고, 결국 아영이가 6번을 달 즈음이 되어 서야 배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입단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사람은 아영이었다. 아영이는 내가 입단 허락을 받았던 그 순간처럼 뛸듯이 기뻐해주었다. 아영이네 코치님도 아영이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입단을 축하한다며 배구화를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지금 떠올려보니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배구에 미쳐 살았다. 학교 점심시간에도 아영이와 토스 연습을 하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리틀 배구단 체육관으로 향해 해가 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열정이 식지 않아 우리 집 마당에서 맞은 편에 살던 같은 배구단 친구와 토스 연습을 하곤 했다. 아영이도 우리 집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안 후로는 아영이 친구까지 모여 넷이서 연습을 해댔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배구만 생각한 지 꽉 채워 3년이 되었다.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도 아영이와의 연습은 쭉 이어져 왔다.
딱 그때까지만.
아영이는 수원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한다면서 이사를 간다고 전했다. 당장 집 근처 중학교에서도 스카웃이 오긴 했지만 수원에 있는 중학교에서 활동하면 그대로 연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로 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이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솔직히 많이 아쉬웠다. 내 배구는 처음부터 그때까지 전부 아영이었으니까. 막말로 아영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배구를 접할 이유도, 배구를 시작할 계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 배구와 다를 바가 없던 아영이가 사라진 시점에서 나는 배구에 대한 마음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아영이도 알았는지,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함께 연습을 하자며 밤에 날 불러냈다.
“너 이제 6번은 버려도 되겠다 야.”
한참 연습을 하던 중에 잠깐 쉬자더니 하는 말이 저거였다. 배구단에 입단 했을 때, 6번이던 아영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도 6번을 달았다. 내가 3년 동안 6번을 고집할 동안 아영이는 훌쩍 자라 어느새 1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6번을 놓을 수 없었다. 아영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는 내가 5번으로 갈 실력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6번을 지켰고, 아영이가 떠나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아영이가 없을 때에도 내가 배구를 시작했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영이의 마지막 흔적인 6번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년 동안 6번이었는데 뭘 또 바꿔.”
“에이, 이제 6번 달 실력은 아니잖아. 지금도 나 이겨 먹고 있구만.”
그때의 아영이는 내가 전학 온 날 마주했던 아영이와 똑같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아영이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매일같이 불러내서 연습을 할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애초에 초면인 애를 따라가 경기를 보고 나서 그 애와 같이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난 아영이를 좋아했던 것이다. 알고 있었어도 내가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미 터져 나온 감정은 수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서 깨달았으니, 별 소용이 없게 되었다. 고작 열 세 살인 애가 앞날이 창창한 미래의 유망주 선수를 붙잡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아영이는 날 정말 친구로만 생각했을 테니까. 좋은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 그 날도 그저 연습만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내 3년의 짝사랑을 보냈다.
아영이가 이사를 간 후에도 내 배구는 끝나지 않았다. 물론 전처럼 매일의 연습이 기다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전처럼 성실하게 연습을 해 나갔다. 입학하게 된 중학교에는 배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리틀 배구단 활동도 꾸준히 나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 앞에 살아서 매일 같이 연습을 했던 배구단 친구는 배구단을 그만 뒀다. 이제 중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매일 몇 시간 씩 배구에 시간을 들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님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내가 공부에 전념하길 원하고 계신 것 같았고, 나도 이제는 진로에 대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댄다 한들 고작 열 네 살이었고, 배구를 놔주기에는 여러 미련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그래서 그냥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별 생각 없이 배구와 공부를 병행했다. 병행이라고 해봤자 나는 일반고에 진학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내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설령 중요했더라도 배구단 활동과 시험공부를 같이 했을 때 성적이 전교권에서 알아주는 정도였기에 상관없었을 것이다. 부모님도 처음엔 걱정이 많으셨지만 내가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받아오자 더 이상 배구단 활동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무난한 중학교 생활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집 근처에 있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배구단에 다녔던 이유가 학교에는 아마추어 배구부가 없었기 때문이기에 아마추어 배구부가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게 확정된 후에는 리틀 배구단을 탈퇴했다. 물론 6년이나 몸담았던 배구단에서 나온다는 건 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왕복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체육관에 매일 갈 수 있을 정도에 여유는 갖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대입이라는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벤트가 생긴 이상 배구에만 힘을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말 뿐이지, 나는 여전히 배구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영이로 시작한 배구였지만 중학교 시절 내내 아영이가 없으니 배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구가 좋아졌다. 내 짧은 인생 속에서 배구가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당연히 배구로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배구는 놓을 수 없다. 중학교 내내 성적이 좋았으니, 그 기대를 고등학교에도 걸어보는 것이다. 당연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같지 않으니 배구가 차지하는 비율을 확 줄여야 겠지만, 어쨌든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 이렇게 라도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입학식 다음날, 바로 코치님을 찾아가 배구부에 입부 하겠다며 입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때 남아있던 부원은 내가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입을 이유로 탈퇴한 3학년 형과, 당시 2학년이던 형 둘까지, 단 셋 뿐이었다.
”…너는 공부 안 해?“
”아, 해야죠. 근데 배구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배구부 활동 했었어?”
“배구부는 아니고 리틀 배구단에서 라이트로 뛰었습니다.”
”…중간에 나갈 건 아니고?“
”네? 아, 네. 당연하죠. 졸업할 때까지 배구부만 할겁니다.“
다른 건 다 기억에서 흐릿해져 가도, 확신에 찬 내 말을 듣자마자 시원하게 웃던 형의 표정은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걱정하던 표정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던 순간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무튼, 그렇게 난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배구를 지금껏 붙잡고 있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내년에도, 또 어쩌면 내후년에도, 그렇게 코트 위에 남아있다가 나중에는 어쩌면 아영이까지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다. 아영이는 끝까지 정상에 남아있어야 한다. 나중에라도 포스트 김연경으로 주목 받아 해외에도 가봐야 한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준 사람이니, 이 작은 나라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언제까지고 사랑하고, 언제까지고 동경할 수 있는, 그렇게 밝게 빛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쭉 수원에서 살다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며 당연히 학교도 옮기게 되었다. 이제 막 여름이 저물어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에 마주했던 서울은 그때의 내가 느끼기에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 같았다. 수원도 워낙 큰 도시라고 생각했고, 같은 수도권인데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냐고 무시하던 내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차로 한 시간이면 들어올 수 있는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뭔가 달랐다. 흘러가는 공기와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유독 매서웠다. 타지인이라고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질감을 느꼈었다. 아무튼 갓 서울에 들어왔을 때 나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는말이다.
전학 온 첫날, 나는 정말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기만 했다. 요란한 자기소개로 관심이나 끌어볼까 하다가 그럴 성격이 못되어서 그만 뒀다. 그래도 전학생이라고 주변 친구들이 스멀스멀 다가와 말을 건내줬었다.
그 때, 그 많던 아이들 사이로 눈에 띄게 밝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고작 열 살이었지만 누가 봐도 ‘나 운동선수에요’하고외치던 몸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여자였는데도 나랑 비슷할 것 같은 키에 길쭉길쭉한 팔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었다. 그게 그 아이의 첫 인상이었다.
혼자 너무 밝게 빛나고 있길래 처음엔 말도 못 걸고 바라 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내가 재미가 없어졌는지 다들 자기들끼리 모여 되돌아가는 아이들 사이에 서서 그 아이만 날 향해 계속 웃고 있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지금도 생각날 만큼 바보같이 대답했었다. 말도 엄청 더듬고, 발음도 꼬여서 세 번 넘게 내 이름만 물어봤었다.
“아, 박성태? 나는 문아영이야. 친하게 지내자! 사실 나도 전학생이거든.”
세 번이나 물어봤어도 이름을 잘못 부르던 것 때문에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때는 내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 진짜?”
“응, 진짜. 근데 너도 운동선수야?”
“어? 아니?”
갑자기 운동선수냐는 말에 당황해서 삑사리까지 났었다. 아영이는 소리 내어 몇 번 웃더니 키가 엄청 크길래 당연히 운동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며 키가 아깝다는 이야길 했다. 평소에도 키 때문에 운동을 해보라는 말을 수 없이도 들었던 나이기에 아영이의 말이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 만 보고 있자 아영이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배구 선수가 꿈이야! 그래서 여기로 전학 왔어.”
“우와, 멋지다.”
배구가 뭔지도 모르고, 전학이랑 배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그저 부모님이 서울로 오자 길래 그러자고 했고, 전학을 가자 길래 그러자고 했을 뿐인데 아영이는 아니었다. 온전히 자신의 꿈을 위해 환경을 바꾸어냈다. 거기서 나와는 다른 아영이에게 존경심 엇비슷한 감정을 받은 것이다.
그 날, 그새 아영이와 친해졌던 나는 아영이를 따라 배구부 훈련이 있던 체육관에 놀러 갔다. 아영이는 내게 잠깐만 기다리라 더니 금방 옷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와서는 환히 웃으며 내게 자랑했다.
“어때? 멋지지! 이번에 새로 받은 유니폼이야.”
아영이가 뒤를 돌아 자신의 이름과 등 번호를 가리켰다. 기분 탓이었는지 햇빛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A. Y. Moon’이라는 이니셜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넋을 놓고 유니폼만 바라보고 있자 아영이가 다시 날 바라보며 서고는 조잘조잘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15번인데, 이번에 처음 들어와서 그렇대. 나중에 실력이 늘면 번호도 점점 작아질거야!”
“그럼 넌 지금 15등인거야?”
“응, 그치. 물론 15명 중에 15등인거지만.”
“꼴찌네.”
“지금은 꼴찌지! 나중엔 내가 1번 할 거야.”
장난삼아 던진 말에 아영이는 잠깐 시무룩해 보이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다짐했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이 참 예뻐 보여서 괜히 핀잔을 주려 던 참에 체육관 끝에서 코치님으로 보이는 선생님이 아영이를 불렀다. 아영이는 내게 작게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잘 구경하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께 달려갔다. 나는 아영이의 말에 순순히 체육관 가장자리에 기대 앉았다. 배구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아영이가 배구를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아영이는 배구부원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한동안 몸을 풀며 스트레칭을 하고 체육관을 몇 바퀴씩 내달리더니, 슬슬 지루해질 즈음에 코트에 섰다. 아까는 아영만 보느라 다른 부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열 두 명의 부원이 코트를 가득 채우고 서있는 모습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같은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커 보였다.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었다. 모두들 진지한 얼굴로 공을 주시하며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점수를 따거나 지켜냈다. 그 순간 만큼은 어른들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기개를 모두가 지니고 있었다. 하늘 위로 날아올라 공을 바닥에 내리 꽂고는 포효하는 아영이를 보자마자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고.
연습 경기가 끝나자마자 아영이는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 밤 늦게 까지 계속 연습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바라봤을 때 이미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기, 다음에도 보러 와도 돼?”“당연히 되지! 꼭 놀러 와!”
아영이는 내가 체육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걸 바라보며 뒤를 돌아 밖으로 나올 때,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나도 아영이랑 같이 경기를 뛰고 싶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당연하게도 왜 이렇게 늦었냐며 엄마께 꾸중을 들었다. 그때 아랑곳 않고 엄마께 바로 말씀드렸던 것 같다. 배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엄마는 잠깐 놀라신 듯 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셨다. 그러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물어보시길래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모조리 말씀드렸다. 아영이를 만난 일부터 체육관에서 나올 때 들었던 생각까지 전부. 엄마는 가만히 듣고만 계시다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활짝 웃으며 초등학생도 배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배구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듯 했다. 고작 연습 경기를 딱 한 번 봤을 뿐이고, 다음 주면 그새 배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그만두고 싶어할 거라며 나를 다그치시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엄청 충동적이긴 했다. 나도 다음 주의 내가 여전히 배구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주저하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아빠와 함께 조건을 제시하셨다. 다음 달이 되어서도 배구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때 가서 배구를 배우게 해주신다고. 당연하게도 나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 이후부터 거의 매일같이 아영이를 따라 우리 학교 배구부가 훈련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켜보다 오곤 했다. 나중에 가서는 학교가 끝나면 아영이와 함께 체육관에 가는 게 당연해질 정도였다. 이미 반 친구들과 친해져 있던 아영이와 붙어다니면서 같은 반 친구들과도 빨리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배구부 훈련을 구경한 지 꼬박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배구를 배워보고 싶다는 욕구로 가득 차있었다. 배구부 코치님이 날 알아보고 몇 번 기본기 훈련에 끼워주실 정도였으니 내 주변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말 만으로는 내 열정을 보여드리기 힘들 거라고 판단해 우리 학교 배구부 코치님과 함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은 내가 부탁 드린 대로 배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아이이니 한 번 배구를 배우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고, 엄마는 한참을 웃으시더니 내게 전화를 바꿔 당장 배구 학원을 알아보러 가자고 하셨다. 그 때에 나는 너무 기뻐 몇 번이고 코치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아영이도 그 소식에 같이 기뻐 해주며 너도 꼭 등 번호가 9번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내가 배구를 시작할 무렵, 아영이는 벌써 여섯 계단이나 올라서 있었다.
그 뒤로 배구단을 찾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초등학생도 들어갈 수 있는 배구단은 당연히 흔치 않았고, 엘리트 배구부가 아닌 취미로 하는 배구단을 찾다보니 남는 건 시에서 관리하는 리틀배구단 뿐이었다. 겨우 찾았던 리틀 배구단에도 지금은 자리가 없다는 말로 거절 당하다 예비 3번을 받고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한 해가 넘어갔고, 결국 아영이가 6번을 달 즈음이 되어 서야 배구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입단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사람은 아영이었다. 아영이는 내가 입단 허락을 받았던 그 순간처럼 뛸듯이 기뻐해주었다. 아영이네 코치님도 아영이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입단을 축하한다며 배구화를 선물해주시기도 했다. 지금 떠올려보니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배구에 미쳐 살았다. 학교 점심시간에도 아영이와 토스 연습을 하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리틀 배구단 체육관으로 향해 해가 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열정이 식지 않아 우리 집 마당에서 맞은 편에 살던 같은 배구단 친구와 토스 연습을 하곤 했다. 아영이도 우리 집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안 후로는 아영이 친구까지 모여 넷이서 연습을 해댔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배구만 생각한 지 꽉 채워 3년이 되었다. 어느덧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도 아영이와의 연습은 쭉 이어져 왔다.
딱 그때까지만.
아영이는 수원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한다면서 이사를 간다고 전했다. 당장 집 근처 중학교에서도 스카웃이 오긴 했지만 수원에 있는 중학교에서 활동하면 그대로 연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로 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이사를 결정했다고 했다.
솔직히 많이 아쉬웠다. 내 배구는 처음부터 그때까지 전부 아영이었으니까. 막말로 아영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배구를 접할 이유도, 배구를 시작할 계기도 갖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내 배구와 다를 바가 없던 아영이가 사라진 시점에서 나는 배구에 대한 마음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아영이도 알았는지, 떠나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함께 연습을 하자며 밤에 날 불러냈다.
“너 이제 6번은 버려도 되겠다 야.”
한참 연습을 하던 중에 잠깐 쉬자더니 하는 말이 저거였다. 배구단에 입단 했을 때, 6번이던 아영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도 6번을 달았다. 내가 3년 동안 6번을 고집할 동안 아영이는 훌쩍 자라 어느새 1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6번을 놓을 수 없었다. 아영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는 내가 5번으로 갈 실력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6번을 지켰고, 아영이가 떠나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아영이가 없을 때에도 내가 배구를 시작했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영이의 마지막 흔적인 6번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년 동안 6번이었는데 뭘 또 바꿔.”
“에이, 이제 6번 달 실력은 아니잖아. 지금도 나 이겨 먹고 있구만.”
그때의 아영이는 내가 전학 온 날 마주했던 아영이와 똑같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아영이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매일같이 불러내서 연습을 할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애초에 초면인 애를 따라가 경기를 보고 나서 그 애와 같이 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난 아영이를 좋아했던 것이다. 알고 있었어도 내가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해서는 안 될 사람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미 터져 나온 감정은 수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서 깨달았으니, 별 소용이 없게 되었다. 고작 열 세 살인 애가 앞날이 창창한 미래의 유망주 선수를 붙잡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아영이는 날 정말 친구로만 생각했을 테니까. 좋은 친구로라도 남고 싶어 그 날도 그저 연습만 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내 3년의 짝사랑을 보냈다.
아영이가 이사를 간 후에도 내 배구는 끝나지 않았다. 물론 전처럼 매일의 연습이 기다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전처럼 성실하게 연습을 해 나갔다. 입학하게 된 중학교에는 배구부가 없었기 때문에 리틀 배구단 활동도 꾸준히 나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 앞에 살아서 매일 같이 연습을 했던 배구단 친구는 배구단을 그만 뒀다. 이제 중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매일 몇 시간 씩 배구에 시간을 들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진로에 대해 생각했다. 부모님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내가 공부에 전념하길 원하고 계신 것 같았고, 나도 이제는 진로에 대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된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주변에서 아무리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댄다 한들 고작 열 네 살이었고, 배구를 놔주기에는 여러 미련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
그래서 그냥 중학교를 다니는 내내 별 생각 없이 배구와 공부를 병행했다. 병행이라고 해봤자 나는 일반고에 진학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내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고, 설령 중요했더라도 배구단 활동과 시험공부를 같이 했을 때 성적이 전교권에서 알아주는 정도였기에 상관없었을 것이다. 부모님도 처음엔 걱정이 많으셨지만 내가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받아오자 더 이상 배구단 활동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무난한 중학교 생활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집 근처에 있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원래 배구단에 다녔던 이유가 학교에는 아마추어 배구부가 없었기 때문이기에 아마추어 배구부가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게 확정된 후에는 리틀 배구단을 탈퇴했다. 물론 6년이나 몸담았던 배구단에서 나온다는 건 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왕복 1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체육관에 매일 갈 수 있을 정도에 여유는 갖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대입이라는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벤트가 생긴 이상 배구에만 힘을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말 뿐이지, 나는 여전히 배구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영이로 시작한 배구였지만 중학교 시절 내내 아영이가 없으니 배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구가 좋아졌다. 내 짧은 인생 속에서 배구가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당연히 배구로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배구는 놓을 수 없다. 중학교 내내 성적이 좋았으니, 그 기대를 고등학교에도 걸어보는 것이다. 당연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같지 않으니 배구가 차지하는 비율을 확 줄여야 겠지만, 어쨌든 아예 없앨 수는 없으니 이렇게 라도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입학식 다음날, 바로 코치님을 찾아가 배구부에 입부 하겠다며 입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때 남아있던 부원은 내가 들어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입을 이유로 탈퇴한 3학년 형과, 당시 2학년이던 형 둘까지, 단 셋 뿐이었다.
”…너는 공부 안 해?“
”아, 해야죠. 근데 배구를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배구부 활동 했었어?”
“배구부는 아니고 리틀 배구단에서 라이트로 뛰었습니다.”
”…중간에 나갈 건 아니고?“
”네? 아, 네. 당연하죠. 졸업할 때까지 배구부만 할겁니다.“
다른 건 다 기억에서 흐릿해져 가도, 확신에 찬 내 말을 듣자마자 시원하게 웃던 형의 표정은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있다. 걱정하던 표정이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던 순간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무튼, 그렇게 난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배구를 지금껏 붙잡고 있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사랑하는 만큼, 어쩌면 내년에도, 또 어쩌면 내후년에도, 그렇게 코트 위에 남아있다가 나중에는 어쩌면 아영이까지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다. 아영이는 끝까지 정상에 남아있어야 한다. 나중에라도 포스트 김연경으로 주목 받아 해외에도 가봐야 한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준 사람이니, 이 작은 나라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언제까지고 사랑하고, 언제까지고 동경할 수 있는, 그렇게 밝게 빛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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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성태님😌 계속 코트 위에 남아있다면... 아영이와의 이야기는 아직 계속 되는거죠? 성태님의 마음이 너무 예뻐서 보는 저도 꼭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