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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둥그니까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정영은
작성일
2024-02-21 01:31
조회
134
나는 어릴 적부터 영화관에 가는 것을 참 좋아했다.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에 들어서면 달큰한 팝콘 냄새가 났고, 내가 군것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도 이곳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그 달콤함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어두운 통로가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티켓에 쓰인 좌석 번호를 주문처럼 되뇌이면 어둠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우스운 장면에서 함께 웃고, 별로 슬프지 않은 장면에서 나 혼자 훌쩍거리다 놀림거리가 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터져나오는 각자의 감상을 듣는 경험들이 나에게는 퍽 소중했달까.

그래서인지 나는 관련 학과에 진학했고, 어느 순간부터 영은이를 만나려면 영화관에 가면 돼, 라는 말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번졌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영화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모두 섭렵하고도 회고전, 특별전 등을 찾아 헤매던 나에게 친구가 축구를 보러 가자고 했다. 축구? 내가 아는 축구선수는 박지성, 기성용, 손흥민이 다였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머릿속에서 찾아 헤매던 찰나,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게끔 새로운 문장이 뒤따랐다.

“영화관에서 상영한대.”

아, 영화관이라니.

신선한 제안에 매혹된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큰 고민 없이 수락했고, 모두가 잠든, 아니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자고 있었어야 하는 시간에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서 마주한 붉은 물결이 낯설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들뜨는 광경에 나는 몹시 신이 나 있었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친구 옆에서 구색을 맞추려 옷장을 뒤져 빨간 가디건을 챙겨 입은 나는 오늘 꼭 이겼으면 좋겠다, 는 말을 연신 되풀이했다. 하지만 친구의 반응은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상대가 포르투갈이라고 했다.

“그게 왜? 잘하는 팀이야?”

“너 호날두는 알지? 호날두가 포르투갈이야. 축구 잘하는 나라 중 하나야.”

맥이 탁 빠졌다. 새벽마다 지구 반대편의 축구를 챙겨보는 동생이 세리모니를 종종 따라했던 기억이 났다.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내가 얼굴, 이름, 등번호, 심지어 세리모니까지 알고 있는 유명한 선수의 이름이 등장하자 괜히 나까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거야, 스포츠는. 축구공은 둥그니까.”

시무룩해진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친구가 축구는 끝까지 가 봐야 안다며 다독였다. 왜인지 그 다독임은 나보다는 대한민국 선수들을 향하는 것처럼 들렸다.

경기는 재미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영화관에서 이렇게 큰 소리를 내 본 건 처음이었다.

초록이 가득한 화면. 하양 유니폼, 빨강 유니폼. 빨간색이 우리나라, 그 중 마스크를 쓴 사람이 손흥민. 이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궁금한 게 생기면 친구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바삐 공의 움직임을 좇는 눈동자를 보자 말을 거는 순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선수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면 박수가 터져나왔고,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슈팅이 빗나갈 때면 안도의 한숨, 또는 아쉬움의 탄식이 상영관을 가득 메웠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르투갈이 득점했다. 실망감에 영화관이 조용해 질 거라 예상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열정적이었다. 앉아서만 보기에는 좀이 쑤신지 자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프사이드니 코너킥이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이 오가고 마침내, 스코어는 1:1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득점은 내가 카타르에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찬란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기뻐했다. 흥분한 누군가가 팝콘 통을 흔들었고, 흩날리는 팝콘이 꼭 폭죽 같아 보였다. 밀리고 있는 점수를 보고 지레 기가 죽었던 내 모습이 창피했고, 스포츠는 끝까지 가 봐야 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두 팀은 계속해서 사이좋게 슈팅을 주고받았다. 득점은 나오지 않았다. 룰도 잘 모르면서 괜히 긴장이 되었다. 언제부터 쥐고 있었는지 모를 손바닥이 축축했다. 긴장감을 잊기 위해 나도 사람들을 따라했다. 눈앞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이 축구 경기가 아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욕을 한 바가지는 들어먹을 정도로 시끄럽게 굴었다. 그렇게 하니 떨리는 마음이 좀 괜찮아지는 것도 같았다.

요란한 환호가 간절함으로 바뀔 때 즈음, 초록색만 가득한 반대편으로 한 선수가 질주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후반 91분, 골이 터졌다.

영화보다 영화같은 스포츠 정신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고,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 다 뭉개진 발음으로 역설했다. 외국어를 듣고 있는 양,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승점이니, 골 득실이니, 그런 것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하나는 분명히 이해했다.

“잠깐, 그래서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했다고?”

“응. 12년 만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켠 휴대폰 화면에는 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빨간 유니폼이 한 명도 없는 텅 빈 반대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공을 끌고 가던 그 선수처럼,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전력을 다해 뛰어 먼저 도착해 있던 그의 동료처럼,
상대가 누구든 기 죽지 않고 열심히 뛰다 보면 내 인생에도 기적과도 같은 승리가 올 거라 믿는다.

그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
스포츠는 끝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니까. 축구공은 둥그니까.
전체 1

  • 2024-02-22 11:12

    와.. 글을 정말 잘쓰세요. 하나의 경기가 누군가에게 이러한 소중한 추억을 안겨주었네요. 저도 영화관에서 축구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글을 읽으면서 제가 겪었던 그 모든 장면이 오버랩이 되면서 저 역시 거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예쁜 추억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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