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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야구장을 타고 우주로 갔을까?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선경희
작성일
2024-02-22 02:37
조회
129
해질녁 잠실 야구장 외야에 앉아
내야쪽 관중석 출입구로 하늘을 본 적 있으세요?
야구장 전체가 마치 우주선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럼 막 가슴이 두근거리죠.
이 모든 사람들을 태운 채 먼 우주로 날아갈 것 같거든요.
그런 기분이었죠.
녀석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을 때.

그러니까 오래전, 오래전이예요. 까마득히. 하, 하, 하.
야구장을 집처럼 드나들었죠.
서른을 이제 막 밟고 지나오던 때.
동호회에 여섯살 어린 후배가 있었죠.
다리털이 부숭숭하게 많아서 반바지를 입고 온 날
모두에게 놀림을 받았던 아재 개그의 귀재(?).
다들 우~우하는 그 뻔한 말장난이 왜 그리 재밌었는지
나는 늘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져서 한잔,
이겨서 한잔
선수들 코칭 스탭 구단을 안주 삼아
우리들은 신천에서 맥주를 마셨죠.
집 방향이 같았던 녀석과 나는 마지막 전철을 타러
같이 뛰곤했죠.
나에게는 막차였지만, 녀석에게는 다음 전철이 한대 더 있었어요.
어느날인가 같이 뛰다가 갑자기 녀석이 걷더라구요.
이유를 몰랐지만 전철을 놓칠 수 없었던 나는 그대로 뛰어갔죠.
왜 저러지 나한테 뭐 화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말했잖아요. 이건 오래전, 오래전 얘기라고.
여자 나이가 여섯살 많은 커플은,
정말 흔치 않은 시절이었죠.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된 날
다들 대학로에 모여서 거하게 술을 마셨죠.
집에 와 가방을 보니 녀석이 좋아하는 테디베어 인형이 들어있었어요.
설마, 내 가방에 넣었을꺼란 생각은 못했죠.
녀석보다 네살이 어린, 녀석을 좋아하는게 너무
분명해 보였던 다른 여자 후배 가방과 내 가방을
착각했다고 생각했죠.

아 그때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할까 한참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먹고사니즘에 대한 질풍노도 같은 고민에
휩싸여 있던 시기. 나보다 열살이 어린 그녀에게 아무래도 녀석이
너와 나의 가방을 헷갈린 것 같다는 말을 할까, 말까 생각은 했어요.
그러다 그냥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게 두자
결론지었죠.

그리고 종로에서 술'번개'가 열렸어요.
그 술집은 남녀 화장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남자 화장실 앞에 있던 녀석을 툭 치며 반갑게 말했죠.
안녕~
그러자 녀석이 무서운 얼굴로 대답했어요.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죠.
순간 알았죠. 그 테디베어 인형은 제자리에 놓여졌던거고,
그건 고백이었던다는 거.

모두들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취했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있었어요.
녀석과 나만 서로를 보고 있었죠.
간절하고 슬픈 눈으로 나를 보는 녀석의 뺨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렇게 우리는 1일을 시작했죠.

그래서 어떻게 됬냐구요?
그 녀석과 토끼같은 아이들을 낳고
도란도란 늙어가고 있냐구요?
말했잖아요. 그 시절에는 여자가 여섯살이 많은 커플은
매우 드물었다고. 무엇보다 나는 노처녀(?)가 되기 직전의 백수였고
녀석은 학생이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라도 하는 듯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고,
나는 헤어지자고 했어요.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려준 녀석이 몸을 돌려 걸어가는 순간부터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어요. 창피고 뭐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내내 엉엉 울면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어요.
용감하지 못한 내가,
나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녀석이,
둘다 참 미웠거든요.

네 저에게 야구장은 그래요.
여전히 우주선이 되서 하늘을 날 것 같은 곳.
가슴을 설레게 하죠.
다리털이 부숭숭하던 녀석과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내 청춘의 마지막 순간이 담겨 있거든요.

야구든 축구든 탁구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경기장에 가보세요.
경기장의 에네르기가 당신의 호르몬과
찌르륵 교감하며 뭔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 있어요.
우주선이 되서 우주로
잠수함이 되서 바다로
회전목마가 되서 살랑살랑 세상 속으로.
야구장에서 나는 그렇게 언제나 청춘이예요.

그게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있을 수 밖에 없고, 있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시포요라고
김성근 감독님 말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체 2

  • 2024-02-22 10:44

    안녕하세요 선경희님. 댓글을 달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정말 아침부터ㅠㅠㅠ 눈물ㅠㅠㅠㅠ
    누구나 그런 마음, 아련함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담백하게 풀어내시다니.ㅠㅠ
    담백한데 계속 여운이 남는, 저릿한 글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ㅠㅠ


    • 2024-02-22 18:49

      그렇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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