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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루어진다던 22년 전의 추억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김주영
작성일
2024-02-25 18:04
조회
99
내 기억 속 첫 축구는 작고 네모난 텔레비전으로 봤던 98년 프랑스 월드컵이다. 너무 어릴 적이라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아 있지만, 확실히 축구라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동그란 공이 초록의 잔디 위에서 튀어 다니고, 그 공 하나를 위해 선수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인상 깊었다.

어떤 리그가 있고, 어떤 대회가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10대였지만 월드컵은 4년마다 돌아온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렇게 나는 2002년을 맞이했고 축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을 이 공놀이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그때를 떠올리면 '내가 성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곤 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던 나이여서 더 괜찮았던 나만의 기억을 갖게 된 것 같다.

월드컵을 치르는 그 시기는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고 있던 때였다. 친구들은 방과 후 남는 시간에 독서실을 다녔지만 나는 당시 접할 수 있던 언론을 통해 최대한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 오빠들의 영상을 비디오에 녹화하고, 신문 기사나 사진을 스크랩하기 바빴다. 내가 얼마나 열혈이었냐면, 단골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축구를 안 본다고 하시길래 "월드컵인데 어떻게 축구를 안 봐요?" 당돌하게 굴다가 비디오 가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축구도 잘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좋아만 했기에 쓸데없이 용감했던 것 같다.

그리고 2002년의 월드컵은 내게 축구 첫사랑을 남겼다.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가진 김남일이었다. 고1 소녀답게 내 최애 선수와 친구들의 최애 선수가 등장하는 팬픽을 쓰기도 했다. 최애 선수가 겹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포인트로 축구선수처럼 우리만의 팬픽 포지션이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 소설 속에서 우리는 마음껏 행복해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던 나머지 사고의 1단계를 무작정 밟았다. 나처럼 심각하게 축구에 빠진 (혹은 축구선수에 빠진) 친구 몇몇과 작전을 짜고 집에는 독서실에 다녀온다 말하고 인천으로 떠났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차비와 컵라면 사 먹을 돈만 겨우 챙겨서.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인천 문학경기장 근처의 한 호텔에서 대표팀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고, 인터넷 정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던 때도 아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갔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장장 5시간을 달려 인천에 도착했다. 좁고 딱딱한 버스 의자에 한참 앉아있었더니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지만 우리 대표팀 선수들을 볼 생각을 하면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가슴에 불이 나는 듯했다.

새벽에 출발한 버스를 타고 오전 중에 도착을 한 터라 대표팀이 머무른다는 호텔로 바로 갔었다. 이른 시간이라 호텔 주변에 팬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고 딱히 막아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생애 처음으로 호텔로 들어가려니 긴장감이 엄청났다. 그때의 나는 숙박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조심조심 그러나 날쌔게 주차된 차 사이사이로 숨어 이동했다. 그 순간엔 내가 <미션 임파서블> 정도의 영화 주인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톰 크루즈에 빙의한 여고생은 무사히 호텔 로비에 도착했지만 움직임을 시작한 경호원들에게 들통이 나 로비 밖으로 아니, 호텔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렇게 쫓겨난 나와 친구들은 호텔 앞에 죽치고 앉았다. 만화 세일러문의 옷처럼 예쁜 세일러복이 아닌 라인 없이 일자로 떨어지는 세일러복을 입고 귀밑 3센티의 똑 단발머리에 복숭아뼈에서 5센티 올라간 양말과 검정 단화를 신은 고등학생은 누가 봐도 촌티가 났다. 하지만 그때만큼 우리 학교 교복의 주름 많은 치마가 유용한 때가 없었다.

바닥에 아무것도 없이 교복 치마를 돗자리 삼아 앉아 있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순수한 시골 바이브의 학생들이 처량해 보였는지 빵집 사장님이며 분식집 사장님이며 심지어 경호실장님까지, 주변에 계시던 많은 어른들이 먹을거리를 챙겨주셨다.

나는 거기서 "김남일 선수 팬이에요!" 자랑처럼 말하며 나를 소개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학생이 멀리까지 와서 열정이 대단하다고 해주니 괜히 뿌듯했다. 사실은 덕질을 위해 시험기간에 공부도 안 하고 집에다 거짓말까지 하고 온 고딩일 뿐인데. 하나도 멋질 게 없으면서 내가 멋지다고 느껴졌다.

그런 과정에서 너무 많은 관심과 챙김을 받아 운을 다 썼다 싶었는데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속을 꽉 채워 실한 김밥을 몇 줄이나 챙겨주셨던 분식점 사장님이 우리처럼 죽치고 있던 많은 팬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나를 잠시 부르셨다. "학생 잠시만 우리 가게로 와볼래?"

사장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나는 분식집으로 다시 갔다. 내가 옆에 있는데 별말 없이 어디다 전화를 하시고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인데 어디 어디로 가보라며 간단하게 지도를 그려주셨다. 베풀어 주신 친절함에 별다른 의심도 없이 지도대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호텔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적한 동네였다. 동네 미용실에서 코너를 도니 1층에 작은 마트가 있었다. 그 건물의 2층이 목적지였다.

마트의 사장님은 교복 차림의 우리를 보고는 단번에 알아봤다는 표정으로
"학생들이구나! 여기 옆에 계단으로 올라가 봐. 김남일 우리 가게에도 많이 왔었어!" 하셨다.
네? 뭐..라고.. 요? 두근두근
그렇다면 2층은 나의 김남일 오빠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말인데? 콩닥콩닥
심장이 마구 뛰는데 사뿐사뿐 계단을 올라가서 2층 집에 노크를 했다.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는데 맙소사... 그 집은 정말 김남일 선수의 집이었다!

선수 본인은 뭐 당연히 없었고 집에는 가족들이 계셨다. 우리를 반겨주신 분은 할머니였는데 보자마자 참 멀리서도 왔다 하시며 밥은 먹었는지 집에 밥이 없는데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물으셨다.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이미 많이 챙겨주셔서 든든하게 먹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일단 앉으라고 하시고는 빠르게 수박을 꺼내 썰어주셨다. 어느 때보다 달달했던 수박을 맛있게 먹으며 거실에 둘러앉아 여기저기 보이는 액자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앨범 몇 권을 꺼내어 보여주시는데 직접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시는 그 모습에 애틋함이 묻어났다. 나는 최대한 눈에 많이 담으며 김남일 선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자꾸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좋았다.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있으면 민폐인 것 같아서 할머니께 너무 감사했다고 건강하시라고 배꼽 인사드리며 나왔다. 문밖까지 나와서 배웅해주시는 할머니를 보는데 우리 할머니 같아서 뭉클했다.

머지않아 월드컵이 마무리되고 인기 절정이었던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온갖 매체에서 바쁘게 등장했다. 어떤 잡지에 김남일 선수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기억나는 내용이 딱 하나 있다. 월드컵 이후 본인의 인기를 실감하는지, 기억에 남는 상황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김남일 선수는 월드컵 기간 중에 지방에서 팬이 집까지 찾아왔었다고 답변했다. 마음 하나만 챙겨 멀리까지 와서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선수님은 버스 창 너머 실루엣으로만 보았지만 인터뷰의 짧은 답변이 된 것만으로 눈물겹게 감동적이었다.

처음 가 본 인천, 처음 타 본 지하철, 처음 보는 월드컵경기장, 들끓는 열기와 사람들, 최애 선수 집 문 손잡이를 열어 당기던 순간.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이루어'졌던 시간. 이게 벌써 22년 전의 일이다.


그렇게나 요란스러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생활을 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응원했다. 20대가 되니 보다 진지하게 축구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대표팀보다는 자국의 리그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국내 프로축구인 K리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내 마음이 정착할 팀을 만났고 그 팀을 응원해온지가 18년째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고, 그만큼 자주 울고 웃었다. 슬퍼도 울고 기쁘면 더 우는 나는 여전히 직관의 맛을 아는 사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

그간 축구계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나의 축구 생활도 다사다난했다. 축구 첫사랑이었던 김남일 선수는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로도 마주했고 그보다 더 후에 K리그 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돌고도는 흐름을 생각하다 보면 인생사 스포츠처럼 각본 없는 드라마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던 그 옛날처럼 애쓰는 마음이 모여 그 꿈을 다시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의 모든 것이 축구로 연결이 될 정도로 축구에 진심인 나는 알베르 카뮈의 말을 여전히 머리로, 마음으로 새기며 살고 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축구에서 배웠다."

이 한 문장에서도 느껴지듯 축구는 내가 아는 중 가장 아름다운 드라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전체 1

  • 2024-02-27 16:35

    정말 요란스러운 고등학생, 김남일 팬인데, 왜이렇게 그 요란스러움에 사랑스러움이 묻어날까요? 글만 읽어도 왜 인천에 계셨던 모든 분들이 멀리서 온 고등학생을 이렇게 반겼을지, 그 사랑스러움이 여기까지 전달되어요. 그 열정이 K리그에 대한 애정으로 번지다니, 정말 멋지십니다. 앞으로도 그 열정을 응원할게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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