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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fit, Box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지유
작성일
2024-02-26 10:45
조회
61
"지유야, 이 언니 너네 학교 선배래. 친해져 봐."

내 또래라 불릴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곳에 한 살 위 언니가 생기다니!! 꿈일까? 혼자 온 것 같은데 어떻게 오게 된 거지? 크로스핏을 혼자서? 쉬운 일이 아닌데! 첫 인사는 어떻게 건네는 거더라?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어요?’ 아냐. ‘언니, 우리 학교 다닌다면서요?’ 아냐, 이것도 아닌 것 같아. 어떡하지? 뭐라 해야 하지?

“안녕하세요!”

-

이모와 삼촌들로 가득찬 이곳은 박스라고 불린다. 크로스핏을 하는 장소, 박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크로스핏을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즐긴 건 아니다. 사실 하기 싫었다. 내가 찾아온 게 아니라 엄마한테 끌려와 억지로 하기 시작해서 운동이 싫었다. 땀이 나고, 숨이 차고, 운동 다음 날 온 몸이 아파오는 그 느낌이 싫을 것 같아서도 있지만, 우울해서 움직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누가 봐도 우울증 환자였다. 왼쪽 팔에는 항상 자해 흔적이 가득했고, 그걸 가리기 위해 여름에도 겉옷을 입고 다녔다. 학교는 내게 너무나도 끔찍한 곳이었고, 그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 집에 오면 힘이 풀려 침대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학원도 자주 빠졌고, 숙제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만…
누워있기만 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집 근처 크로스핏 센터에 끌고 갔다. 처음으로 남에게 내 몸무게랑 근육량,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무튼 이것저것 굉장히 많은 게 보여졌다. 엄마랑 코치님이 얘기하는 동안 앉아서 둘러보는데 내 또래가 없잖아?! 다 어른들뿐이네. 여기서 내가 운동을?

“너 열심히 해야 돼. 비싼 돈 줬어. 빠지지 마.”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옆에 앉아서 다 듣고 있었어요! 일부러 모른 채 하고 있던 건데 그걸 굳이 왜 알려줘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네.”

아, 내일부터 운동을 해야 한다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든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생긴 건지. 잘할 자신도 없고 잘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엄마 잔소리가 더 싫으니…

-

“지유! 일찍 왔네! 오늘부터 나랑 같이 운동을 할 거야! 천천히 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리하면 안 되니까 힘들면 말해주고! 아직 전 타임 안 끝났으니까 저기 앉아서 기다리면 돼!”
“자, 9시 타임 마무리 스트레칭 할게요!”

우와, 사람이 저렇게 땀에 젖을 수도 있구나…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무언가에 열정적이게 될 수 있을까? 저 분들은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된 걸까? 헉, 눈 마주쳤다…

“못 보던 얼굴이네? 학생이에요?”
“아… 네.”
“음, 그렇구나! 잘 왔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언니! 여기 학생 친구가 새로 왔어! 애기야, 완전 애기!!”
“어머, 진짜 애기네. 몇 살이에요? 볼 좀 봐! 피부 완전 좋다. 역시 애기라서 그런지 완전 탱탱하네. 한 번 만져봐도 돼요?”
“아… 네.”
“아침이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힘이 있어야지 운동을 하지!”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요? 난 이곳에 억지로 끌려왔으니까요. 사실 나는 우울증이 있고요. 운동하기 싫어요.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웃기만 했다.
“하하하… 그러게요. 하하하…”
“10시 반 타임 모이실게요!!”
지옥이 시작됐다. 소파에서 일어나 코치님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전속력으로 뛰는 사람들 옆에서 천천히 걷는다. 걸으면서 뛰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에게서 저런 속도가 나올 수 있는지 몰랐다. 저렇게 빨리 달리는데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하면 저런 표정이 나올까?
운동 첫 날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운동은 엄청 힘든 거 아닌가? 사람들이 와드를 할 때 나는 따로 기본 동작을 배웠다. 땀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이럴수가!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걸을 때마다 누가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같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모래주머니가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지유! 오늘도 일찍 왔네! 어제 운동한 건 괜찮았어? 근육통은 심하지 않고? 오늘도 어제랑 비슷하게 한 번 해보자, 알았지? 저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코치님은 내가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사람들에게 가버렸다. 둘째 날의 운동은 첫 날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나였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달라진 게 보였다. 아예 운동을 못 하는 건 아니구나! 나도 잘할 수 있는 게 있었어!! 내일이 되면 오늘의 나보다 더 잘하고 있으려나? 그럼 내일도 한 번 해볼까?

그렇게 운동에 점점 빠져들었다. 어느순간 박스에서 이모, 삼촌들의 사랑을 듬뿍받는 꼬맹이가 되어있었다. 집에서보다 박스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엄마보다 더 편하게 이모들한테 다가가 안겼다. 삼촌들의 기술을 보고 감탄하고 박수를 치며 “삼촌, 완전 대박 멋져요!!”라고 말하면서 나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한 아빠보다 삼촌들이랑 더 친구처럼 지냈다. 코치님과는 티키타카가 잘 되는 운동메이트가 되었다. 그리고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3년정도가 지났을 때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났다.

-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저도 OO여자고등학교 다녀요!”
“아, 정말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나에게도 드디어 같이 운동하는 또래 친구가 생기다니!! 신난다! 같이 팀와드하면 너무 재미있겠다! 옆에서 횟수 말해주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얼른 운동 시작했으면 좋겠다!

“어, 근데 이거 밴드 뭐예요? 혹시 자해해요? 잠깐만 보여줘봐요.”
아, 첫 만남에 정신병을 들켜버리다니. 가깝게 지내기엔 글렀다. 더 잘 숨겼어야 했나? 날 뭐라고 생각하려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연고는 바르고 밴드 붙인 거예요? 심하게 했어요? 아, 저도 자해했었어요. 당황했죠. 미안해요.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 앞섰네요.”
뭐라고? 방금 처음만난 날 걱정한다고? 그리고 언니도 자해를 했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나처럼 정신병이 있다고?
“자, 6시 반 타임 운동 시작할게요!”
언니랑 나의 첫 만남은 이랬다. 만난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자해 흔적과 정신병을 들켜버렸고, 언니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커밍아웃을 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었다. 첫 만남에 걱정한다는 애길 들어서 그런가… 첫만남에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아무 생각없이 커밍아웃한건데 언니는 이성애자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런. 이놈의 금사빠!!! 어쩌면 좋지. 이미 빠져버렸다. 집에 데려다주고 싶어. 더 얘기하고 싶어! 이성애자여도 괜찮아. 애인이 아니라 그냥 언니여도 좋으니까 같이 있어주면 안 돼?

-

“언니, 오늘 저녁에도 운동 올 거예요?”
“음, 너는 올 거야? 너 오면 나도 올게!”
“좋아요! 언니 저녁에 또 봐요!”
“아, 지유야.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까?”
“어… 언니가요? 왜요? 우리집이 더 먼데?”
“아, 그냥~. 항상 네가 날 데려다주기도 했고, 이번엔 내가 데려다주고 싶어서!”
언니가 날 집에 데려다준다고? 박스에서 언니집까지의 거리에 세 배가 넘는 거리인데도? 무슨 의미지?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하는 말인가? 나 조금 기대해도 되는 건가?

“좋아요!”

집에 가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코치님과 동선이 겹쳐 둘만 있는 시간이 짧았던 게 맞긴 하지만 짧은 것보다 더 짧았다. 팀와드 하는 날은 언제 오려나. 언니랑 둘이서 하고 싶은데!

아침 운동을 하고, 집에 데려다주고, 저녁 운동 전에 만나 같이 박스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데려다 준 집 앞에서 한 시간 넘게 얘기를 하는 날도 잦아졌다. 언니랑 함께 한 시간이 이때까지 느꼈던 감정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니를 놓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옆에 딱 붙어있으려 하고, 대화 주제를 SNS에서 찾아 가고, 장난도 좀 쳤다. 하루종일 박스에서 함께 있는 날도 늘어났다. 내가 한 타임을 더 하고 싶다 하면 언니도 같이 운동했다. 함께 운동하는 사이라니, 그것도 크로스핏을!

-

“지유야. 너는 연애할 생각 없어?”
“네? 저요? 어… 글쎄요? 상대가 있으면 하겠지만… 지금은… 글쎄요?”
사실 연애할 생각 엄청 많다. 다른 사람말고 언니랑. 그런데 왜 이렇게 대답했냐고요? 언니는 이성애자라고 했으니까. 언니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차이면 지금의 관계도 끝나버릴 것 같으니까.
“나는 있어.”
“네? 어… 썸남 생겼어요?”
“아니. 나도 여자 좋아하는 것 같아.”
“아??? 네??? 어???”
너무 당황해서 저런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언니 여자 안 좋아한다면서요?! 다른 여자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러면 그 여자가 나인가요? 그럼 지금까지 했던 말들과 표정, 행동 다 날 좋아해서 나오는 것들이었어요? 진짜? 언니가 날 좋아한다고요?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는 것같아!!! 왜?? 나를?? 진짜로??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우리 사귈래?”

저기, 그, 어… 방금 전에 언니가 한 말 들었어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나보고 사귀쟤요! 나만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도 날 좋아하고 있었대요!! 우리가 이제 친구가 아니라 연인의 사이가 된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언니, 정말요? 언니, 나 좋아해요?”
“응, 좋아해.”

-

크로스핏을 시작하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운동의 매력을 알게 되고, 더욱 빠져들고, 너무 빠져들어서 다치기도 했죠. 그러면서 조절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감정의 교류도 느껴 보고,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도 얻었습니다. 운동과 거리가 멀던 제가 이제는 집에서 스스로 와드를 짜 홈크로스핏을 합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정말로 많은 게 변했습니다.
크로스핏이 이어 준 이모와 삼촌들, 코치님, 그리고 언니와의 관계는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가끔가다 박스 근처를 지나갈 때면 중학생이었던 나를, 고등학생의 나를 떠올리고 사람들을 내 머릿속으로 불러 과거의 그날들을 함께 보냅니다.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이지만, 그래서 더 속상해지지만 그날들의 행복이 너무나도 커 다시 찾게 됩니다. 나에겐 이것이 남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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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7 13:57

    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 얻은 특별한 경험들로 앞으로의 많은 날들을 위로 받으시면서 살 수 있을거 같아요. 특별한 추억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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