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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러너즈 하이(Runner’s High)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철인28호
작성일
2024-02-28 11:07
조회
128
2015년은 특별한 해였다.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광화문광장에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 42.195㎞ 풀코스를 처음으로 완주했다. 그날 나에게는 3시간 45분이라는 풀코스 완주 기록이 부여되었다. 5㎞ 달리기로 시작해, 10㎞와 하프코스만 열댓 번 완주해 본 나이기에 기록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게 목표였다. 뛰다가 힘이 들어 걸어가는 구간도 있었고, 완주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기서 포기하면 영영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어쩌면 그건 세상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보려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마음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처절했던지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으니 양말 여기저기에 동전만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건 6년 전, 내 삶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대출을 받아 친구와 함께 장사를 시작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1년 6개월 만에 장사를 접어야 했다. 서툰 호기로 성공한 사업가를 꿈꾸었으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큰 손해는 봤지만 젊은 나이를 무기로 새로운 길을 찾아 도전하면 된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사라고 했던가.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동업을 했던 친구가 가게를 정리하면서 돌려받은 권리금과 보증금을 갖고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휴대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친구가 살던 자취방을 찾아가 보았지만 방을 빼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난 후였다.
며칠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꼬박 앓았다. 죽은 사람처럼 이렇게 누워있기만 했던 건 처음이었다. 배신감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다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의 병이 커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돌면 순간이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이 아니고서는 괴로운 마음을 다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때는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것만 같았다.
아내와 아이를 생각해 정신을 차려 보려했지만, 쏟아지는 빚 독촉과 차압의 압박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밤마다 술을 마셨다. 소주 2병이었던 주량은 어느새 4~5병까지 늘어났다. 언제부턴가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게 되었다. 술독에 빠져 지내자 아내와의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결국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 있겠다며 짐을 싸 나가버렸다.
벨이 울렸다 하면 빚 독촉 전화뿐이었다. 희망 같은 건 내 삶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안장애까지 찾아왔다.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았더니 ‘의존성알코올중독’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중독 초기이기 때문에 극복이 가능하다며 “집에만 있지 말고 몸을 쓰고 땀을 내어 운동을 해보시라”고 조언했다.
나도 한때는 건강과 하나 만큼은 자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20대 후반부터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왔다.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배가 만삭처럼 튀어 나와 아예 임산부 같은 체형이 되어버렸다.
아내와 아이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들. 나는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파랑새를 쫓아 허겁지겁 살아온 내 삶을 반추해보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자고 나를 다그쳐 보았다. 그러려면 먼저 술부터 끊어야 했다.
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중 우연히 공원에서 뛰고 있는 한 남성을 보았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공원을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나보다 나이가 스무 살 가까이 많아보였지만 그 남성의 눈빛에는 무슨 일이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심지가 엿보였다. ‘그래, 나도 한번 달려보자~ 힘차게 뛰어보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달려서 땀을 빼고 나면 술에만 의지해야 하는 나약한 마음과 복잡한 생각들이 사라질 것 같았다.
다음날, 운동화를 챙겨 신고 동네 골목으로 나와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육중한 체구 탓에 호흡이 가쁘고 무릎이 저려왔다. 당장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힘들어 오래 달릴 수가 없었다. 달리기를 멈추고 제자리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빠르게 걸어보았다. 여전히 몸은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견뎌 볼만 했다.
이날부터 매일 저녁 동네로 나와 1시간 정도씩 걷다 뛰다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쑤셨지만, 일주일쯤 지나니 요령이 생긴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후후~하하’하며 호흡을 두 번 내쉬고 두 번 들이마셨더니 그나마 페이스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골목에서 시작된 달리기는 동네 근처에 있는 호수공원으로 확장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호수공원으로 가 질주하듯 달렸다. 달리기에 재미가 붙으면서 뛰는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갔다. 달리면서도 “나는 왜 달릴까?”를 수없이 질문했다. 그때마다 “잘못된 것들을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선 달려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혼자서 뛰는 것보단 사람들과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달리기동호회에 들어갔다.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도 다양하고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동호회였다. 평일 1회, 토요일 1회 정기적으로 모여 도심 공원이나 유원지 등을 달린다고 했다. 회원들 대부분은 마라톤 풀코스인 42.195㎞를 3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sub-3’가 목표였지만, 동호회에선 자율적인 달리기를 우선시했다. 특히 힘들어 낙오하는 회원이 없도록 서로 힘이 되어주며 달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함께 뛰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성취감을 끌어올리자는 것이 동호회의 취지였다. 동호회 회원들은 초보자인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열렬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었다.
동호회 회원들은 틈틈이 마라톤대회에 참여하곤 했다. 동호회를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동호회 회장의 조언으로 나는 세 명의 회원과 함께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첫 참가에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큰 무리 없이 10㎞를 완주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달리는 이들이 있어서 생애 첫 마라톤을 즐겁게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마라톤 대회가 끝나자,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 화합을 도모하는 뜻 깊은 자리를 가졌다. 회원 32명이 각자 5㎞, 10㎞, 하프코스, 풀코스 등에 등록해 마라톤을 무사히 완주한 만큼 큰 의미가 있는 자리이었다. 모임 특성상 평소엔 술을 마시지 않는데, 그날에는 처음으로 막걸리를 마셨다. 살면서 그렇게 맛있고 그토록 정겨운 술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술을 다시 입에 댄다는 두려움 같은 건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은 나를 중독으로 이끌었던 술이 아니라, 힘든 싸움을 극복해낸 이만 맛볼 수 있는 보약과도 같은 술이었다.
달리기를 통해 2년 만에 15kg이 넘는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차츰 몸이 만들어지면서 달리는 거리도 계속 늘어났다. 달리기를 하며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 사이에 번듯한 직장에 취직을 했고, 아내와의 관계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었다. 빚을 갚느라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거리 위를 달리면서 의지를 다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꿈에 그리던 42.195㎞ 풀코스를 완주해냈다. 3시간 45분. 이 기록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간으로 남게 됐다. 달리기 하나로 이렇게 삶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나를 심각한 알코올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비만에 가까웠던 몸도 엄청난 체중 감량을 통해 누구보다 건강해지게 되었다.
달리기는 열정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이제는 매주 전국에서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등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누구는 건강을 위해서, 누구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린다.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자기 몸 상태에 맞춰 운동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은 달리기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마라톤대회에 나가서도 뛰는 거리나 속도를 자신의 현실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리면서 웃고 공감할 수 있다는 점도 생활체육으로서 달리기가 가진 장점이다.
버거운 현실에 어깨가 처지거나 고개조차 들기 힘들 만큼 자괴감에 빠져들 때는 누구든 거리로 나와 달리기로 한바탕 땀을 쏟아내 볼 것을 권한다. 전력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사점(Dead point: 격렬한 운동으로 호흡이 멈춰버릴 것 같은 죽음의 한계점)과 러너즈 하이(Runner’s high: 격렬한 운동 후에 찾아오는 성취감)를 차례로 맛볼 수 있다. 일상의 고민과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명약인 셈이다.
죽기 전까지 풀코스 완주 50회를 채우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달릴 것이다. 내게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완주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이다. 내가 땀 흘리며 계속 달리는 한, 절대 힘든 현실이나 알코올중독 따위가 나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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