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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세상이 샛노란 태양빛으로 물들다 (축구와 함께한 나의 우울증 극복기)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구시현
작성일
2024-02-28 20:31
조회
72
잿빛 세상이 샛노란 태양빛으로 물들다 (축구와 함께한 나의 우울증 극복기)_구시현(필명)

2018년 스물셋 여름날, 경기도 가평. 2박3일 여행 마지막 날 밤이랍시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먹고 두 명의 친구들은 이미 식탁 위에 엎어져 있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술을 못 먹는(반 잔만 먹어도 구토한다) 나는 홀로 깨어있었다. 그러다 오늘 밤에 월드컵 경기가 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졸린 눈으로 더듬더듬 TV 리모컨을 찾았다. TV를 틀자마자 코너킥으로 우당탕탕 흘러나온 공이 우리나라 선수의 발을 맞고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와! 나의 비명에 친구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도 잠시,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올라간 깃발이 화면에 잡혔다. 뭐야, 김샜네. 다시 흐린 눈이 되었지만, VAR 판독 끝에 골이 인정되자 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3분여 뒤….

“없어요, 없어요. 텅 비었어요. 손흥민! 손흥민! 손흥민─ 고오오올!!”

흥분 어린 캐스터의 목소리가 숙소 안을 가득 메웠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나 또한 격양되어 친구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미쳤나봐! 90분 다 뛰고 이제 추가시간도 몇 초 안 남았는데, 저런 전력 질주라니!”

나는 첫 번째 골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벅차올라 하염없이 미쳤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 당시 나는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 경기만 챙겨보던, 평소에는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대다수의 여자들과 같았다. 그리고 손흥민 선수는 그저 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수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날 나에게 손흥민 선수는 초인적인 인간, 존경받아야 마땅한 의지력의 선수라고 뇌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구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치솟아서 축구 팬이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면역력이 약하게 태어나 툭하면 아팠는데(학생 시절 한 달에 3번 이상 잔병치레 때문에 결석 및 조퇴를 할 정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족력이 있는 불안장애와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러시아 월드컵이 있던 2018년도에도 여전히 완치된 것은 아니어서 대학 생활에 적응을 못해 힘듦을 겪고 있을 때였다. 집안이 어려워서 별로 건강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코피 흘려가며 주말 없이 알바까지 하느라 축구를 챙겨볼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버티다가 몸과 정신이 한계에 다다라 결국 2019년, 휴학을 선택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먹고, 자고, 숨 쉬고 끝. 평소에 좋아하던 게임도 소설책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알바도 그만두니 돈도 없고.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루 종일 하며 누워있었다. 우울증이 악화된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누워서 인터넷 서핑을 하던 도중 손흥민 선수가 역대급 골을 넣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아, 나와는 달리 여전히 잘하고 있나 보네. 어떻게 넣었는지 봐볼까? 제목 그대로 그 골은 미친 골이었다. 수두룩한 어그로성의 과장된 제목이 아니었다. 감명 깊게 본 2018 월드컵 독일전의 골을 연상케 하는 70m 질주 후의 깔끔한 마무리. 바로 그 골은 1920시즌 푸스카스상을 받은 번리전 골이었다. 미쳤다, 미쳤어. 나는 대략 1년 전에도 감탄했던 말을 똑같이 되뇌었다. 이 골을 실시간으로 보았으면 어땠을까. 독일 전 골을 봤을 때만큼 감동스러웠겠지? 어차피 밤낮이 바뀌어서 새벽에 할 것도 없는데, 해외 축구나 한번 봐볼까? 그리고 그때부터 였다.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게.

처음에는 그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저렇게 활동적으로 움직여본 적이 없기에, 맘껏 필드 위를 누비고 다니는 선수들을 보며 대리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다. 승리에 대한 순수한 열망, 뜨거운 열정,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정신력, 그들 간의 유대감…. 축구라는 스포츠에 푹 빠졌다. 특히 손흥민 선수를 보고 있으면 먼 타국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그래서 손흥민 선수가 소속된 토트넘 경기는 메모해놓고 항상 챙겨보았다. 하지만 매 경기 상대 선수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며 때론 지고, 때론 이기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죽고 싶으면 그냥 죽으면 되잖아. 근데 그럴 자신은 없어(여러 번 한강 위에 올라갔지만 보다시피 살아있다). 그럼 지금 무얼 하고 있는거야?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이 세상에서 앞으로 무얼 해야 하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손흥민 선수처럼 엄청난 정신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진 못하더라도 한 사람 구실은 해야지. 계속 이렇게 우울의 늪에 빠져 무기력하게 죽지 못해 살아가고 싶진 않아.

물먹은 솜이불처럼 한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편의점 알바를 구했다. 하루, 이틀, 사흘 늘려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6년 이상 지속되어 온 만성 우울증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2021년, 나의 우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던 열악한 본가(겨울에는 집안에서 패딩을 껴입어야 할 만큼 춥고, 곰팡이 핀 곳이 멀쩡한 벽보다 많고, 저장강박증인 부모님이 주워 오신 짐들로 천장까지 빽빽한)에서 무작정 뛰쳐나왔다. 그저 ‘살기 위해’ 고시원에 들어갔다.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의지력과 부정적인 감정들을 맞이하고, 버리고, 마주 보았다. 조울증은 언니인데, 왜 우울증인 내가 이러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리라는 다짐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잘 맞았고, 명상이나 아침에 햇빛 쐬기, 글쓰기 등 나만의 불안 해소법들을 찾아내면서 우울증을 서서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손흥민 선수의 활약은 한 줄기의 빛과도 같았다. 온통 회색이었던 세상이 손흥민 선수를 보고 있으면 샛노란 태양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만성 우울증 9년 차. 드디어 흑백이었던 세상이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가득 찼다.

작년에 많이 늦었지만,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약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되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이 목표였는데, 28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소설을 써보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가장 먼저, 흑백 세상에서 오로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덜 아프게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현재, 내가 만성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과 우울증 극복기를 담은 에세이 책 발간을 위해 준비 중이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매일 알바가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글을 쓴다. 그러다 보니 체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어 아침 러닝도 시작했다. 남들은 3달이면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데, 몸이 약한 나는 10초, 15초, 20초 이런 식으로 늘려서 3달 동안 겨우 3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남들보다 10배 이상 노력해야 하지만, 언젠가 나도 30분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된다면 화면 속 선수들처럼 운동장에서 공을 차보고 싶다. 20여 번의 접수 끝에 행복주택에 당첨되어 5월에는 3년 만에 드디어 고시원 생활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예정이기도 하다. 무리했더니 이번 겨울 내내 감기에 시달려서 몸은 힘들지만, 목표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 하루하루가 매일매일 반짝이고 있다.

명상을 할 때 몸 안에 구석구석 따뜻한 햇빛이 스며들어 불안과 근심걱정들을 녹여준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가끔 손흥민 선수가 그 태양과도 같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그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웃게 되며 시답잖은 잡생각들이 흩어지곤 하니까.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는 태양 같은 사람. 눈부시게 빛나는(Sunny), 손흥민 선수(Sonny). 몇 번이고 나태해지고, 타성에 젖어 모조리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손흥민 선수를 보며 동기부여를 얻는다. 특히나 2122시즌 리그 마지막 경기가 있던 새벽, 득점왕을 확정 짓는 중거리 골을 보고 감동받아 울기도 하였고, 2223시즌 부상과 각종 악재가 겹쳐 부진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인 지금, 부진을 스스로 털어내고 부활해서 엄청난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더 큰 감명을 받았다. 늘 잘하진 못하더라도,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더라도, 불평불만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전진하는 모습.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만약 또다시 나의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더라도 손흥민 선수를 보며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제가 늘 잘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최선을 다해요. 특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팬들을 위해….” (손흥민 선수의 어록 中)

손흥민 선수, 항상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덕분에 많은 걸 느끼고 배웠고, 지금 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게 뛰어주세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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