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은 아닐지라도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런닝맨
작성일
2024-02-29 15:34
조회
176
솔직히 난 좀 뛴다.
어린 시절부터 ‘잘 뛰는 애’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남들보다 발이 조금 더 빠르단 이유로 세상 사는 데 특별한 이점은 없지만,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육상인이나 체육인의 길을 향해 달려온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해선 남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했다.
나는 그 한계를 일찌감치 인정했다.
뛰는 놈 위엔 더 빨리 뛰는 놈들이 있는 법이고,
뛰다못해 날아다니는 놈들 또한 넘쳐났던 것이다.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더라도 한 번 날아볼 생각은 들지 않던 시간들이 길었다.
비록 선수가 될 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조금 빠른 다리를 가진 것 외에도 오래 달리는 것 또한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이 되어 육군에 입대하자마자 특급전사라는 다소 민망한 타이틀을 얻어냈고, 중대원들 모두가 기피하는 산악 구보 또한 매일 무리없이 달렸다.
내 몸이 날개처럼 가벼워서 쉽게 쉽게 달려댄 것은 아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이 쓰라린 시간들을 참아내고 목표점에 다달아 멈춰설 때.
그 순간의 성취감과 해방감이 너무나도 짜릿했기에 나는 달린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내가 좀 뛴다는 걸 알게 된 중대장은 대대 체육대회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날 집어넣었고,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다른 중대장들과 승부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활약했다기보다는 앞선 주자들이 무난히 잘 뛰어준 덕분에 1등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결승선을 앞두고 나는 순간 고꾸라져버렸다.
신발끈이 느슨해진 상태였던 것을 잘 확인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었다.
그렇게 우리 중대는 패자의 불명예를 안으며 체육대회는 마무리되었다.
패배를 가져왔다는 씁쓸함을 200원짜리 자동판매기 설탕커피로 달래며, 평소와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저녁 일과를 마무리했건만.
다음 날 아침 나는 무릎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체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하면 하루나 이틀 뒤에 멍이 들고 그제서야 어, 아프다 하던 이상한 체질이었는데,
아마 전날 고꾸라지면서 왼쪽 무릎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잘 달릴 수 없을 것이라는 뇌내 망상과, 부상으로 인한 조기 제대가 불가피할 것 같다는 뇌피셜에 사로잡혀 두려움 반, 설렘 반 섞인 야릇한 기분에 취한 것도 잠시.
나는 그 흔한 외래진료 한 번 다녀오지도 못하고 사흘만에 완전 회복했다. 난 무지 건강한 놈이었다.
남은 군생활 동안 꿀 한 번 빨아보겠다는 욕심은 일찍이 물 건너갔지만, 달리는 동안 발을 뻗는 순간에 좀 더 집중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일 것이다.
제대 후 나는 여름 내내 묵혀둔 깔깔이 같은 군바리 냄새를 채 지우지도 못하고, 대학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배정받은 기숙사는 답답하고 외로운 공간이었지만 가까운 곳에 육상 트랙이 있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매일 새벽 곧게 그려진 트랙 라인 위를 달리며
내 하루 또한 틀어지는 일 없이 곧게 그려질 수 있도록 마음을 정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전공을 살려 의류회사 디자인실 소속의 소재 담당자로 취업했다.
전공지식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의류 제조 기업 소재실의 특성 상 무겁고 커다란 원단을 옮겨야 할 일이 많았기에
나와 내 동료는 매일같이 녹초가 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맥주 한 잔에 지친 몸을 누이고, 다시 눈을 뜨면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서러운 일상이자 깊은 애환이었다.
커다란 탑차 안에 가득 우겨진 원단들이 입고되는 날이면, 미리 밖으로 나가 배송 차량이 들어오길 기다리곤 했는데
매번 비슷한 시간에 멋드러진 스포츠 선글라스를 끼고 회사 앞을 달리는 아저씨를 보게 되는 일도 잦았다.
그 어르신을 보는 날이면
내가 마지막으로 뛰어 본 게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
출근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하철 출입구 계단을 달려가는 것 말고,
기분 좋게 땀 흘리고 바람 마셔가며 뛰어 본 적이 언제였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직장 생활에 아주 많이도 지쳐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전우였던 사수마저 곧 퇴사해버렸다. 대체 인력이 쉽게 구해지지 않아 나는 홀로 남겨진 채로 둥글게 잘 말려진 원단 기둥들과 씨름해야 했다.
실수 또한 많아지기 시작했다. 원단 사용량을 체크하는 부분에서 특히 실수가 잦았고.
발주를 깜박하는 일도 간혹 생기기 시작했다.
단거리 경주만큼이나 빠른 스피드를 내는 것이 중요하던 의류 생산업계에서 '빵꾸'가 난다는 건 아주 큰일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과장님 앞에 불려가고 말았다.
일 잘 하고 정 안 주는, 차갑기로 유명했던 무서운 여과장님.
오늘 혼쭐 한 번 제대로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차분한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호수 같은 목소리와는 달리 과장님의 얼굴은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표정이었기에 난 더더욱 긴장해야했다.
생각해보면 과장님의 표정은 언제나 솔직했다.
이미 윗선에서 줄기차게 갈굼 당하고 오셨겠지.
"민욱씨"
"혼자 큰 일하고 있는 거 나도 잘 아는데."
"어려울 땐 얘기해요. 한 숨 돌리게 해 줄 테니까."
"실수는 다시 잡을 수 있어."
과장님의 덤덤했지만 따뜻한 목소리에 한껏 울컥해지는 순간이었다.
"머리 복잡하면 나가서 근처 한 바퀴라도 뛰고 와요."
…뛰고 와요..
그토록 반가운 소리를 저 과장님에게서 듣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과장님, 죄송하지만 말씀 다 끝나신 거면“
"알았어. 끝났으니까 나가도 돼요."
"그게 아니고...잠깐 뛰고 오려구요."
나는 테헤란로를 정신없이 달렸다.
화의실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가기 전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과장님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는 차마 없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는 사내 체육대회 계주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고 행복하게 달렸다.
그 날의 과장님은 나를 향해 웃고 계셨다.
테헤란로 질주 사건 이후 '런닝맨'이라는 특별한 별명을 얻은 나는 회사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아무리 어렵고 속상하고 힘들어도, 내가 달릴 수 있는 여유를 찾아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연을 가진 별명 때문에 몇몇 동료 여직원들의 호기심이 나를 향해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리 속엔 과장님을 향해 달려가는 상상만이 펼쳐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야근을 하고 계시던 과장님께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저, 과장님하고 식사 한 끼 하고 싶습니다.
사석에서요.”
짧았는지, 길었는지도 모를 정적이 지나가고
과장님은 내가 지금껏 본 표정 중 가장 예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과장님과의 데이트가 성사되었느냐?
하..
크리스마스 이브의 몽글몽글한 분위기에 힘입어
시원하게 내 마음을 고백했지만
나는 더더욱 시원한 성격의 과장님께 차이고 말았다.
유쾌하고 러블리한 스토리의 드라마가 펼쳐지길 소망했으나
리얼 휴먼 다큐도 아닌, 누군가의 무미건조한 브이로그 정도로 끝나버린 하루였다.
불교 방송처럼 고요하고 기독교 방송처럼 거룩한 밤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달리기로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뛰기 싫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그 후론 어떻게 됐냐고?
나는 한참이나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
스포츠 용품 판매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설마 실연당한 것 때문에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창업은 내가 오래 전부터 도전하고 싶어했던 일이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모든 걸 던져버리는 놈이라면
과장님은 물론 스스로를 볼 낯이 더욱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저 아주 멋진 사람이 내 상사였음에 감사하고, 나 역시 더욱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은 아니더라도
꿈꾸는 놈이 될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꿈을 위해 달리다 보면
언젠가 과장님께 내 호흡이 들리게 될지도 모르지.
일이 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고
계획보다 근심이 가득할 때,
비록 느릴지라도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통해 배워나가는 중이다.
1등이 아니라도 좋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과 감동이 가득한 마라톤 같은 삶이 있으니까.
두 다리로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순간이
작은 신체 하나가 커다란 지구를 두드리는 기적이라 생각하면 크나큰 용기가 솟아난다.
지난 날들은 Ready,
오늘은 Get set,
내일은 Go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내일을 달리는 런닝맨이다.
어린 시절부터 ‘잘 뛰는 애’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남들보다 발이 조금 더 빠르단 이유로 세상 사는 데 특별한 이점은 없지만,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육상인이나 체육인의 길을 향해 달려온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재능에 대해선 남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했다.
나는 그 한계를 일찌감치 인정했다.
뛰는 놈 위엔 더 빨리 뛰는 놈들이 있는 법이고,
뛰다못해 날아다니는 놈들 또한 넘쳐났던 것이다.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더라도 한 번 날아볼 생각은 들지 않던 시간들이 길었다.
비록 선수가 될 만한 수준은 절대 아니었지만, 나는 조금 빠른 다리를 가진 것 외에도 오래 달리는 것 또한 꽤 잘했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이 되어 육군에 입대하자마자 특급전사라는 다소 민망한 타이틀을 얻어냈고, 중대원들 모두가 기피하는 산악 구보 또한 매일 무리없이 달렸다.
내 몸이 날개처럼 가벼워서 쉽게 쉽게 달려댄 것은 아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이 쓰라린 시간들을 참아내고 목표점에 다달아 멈춰설 때.
그 순간의 성취감과 해방감이 너무나도 짜릿했기에 나는 달린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내가 좀 뛴다는 걸 알게 된 중대장은 대대 체육대회 계주의 마지막 주자로 날 집어넣었고,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다른 중대장들과 승부 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활약했다기보다는 앞선 주자들이 무난히 잘 뛰어준 덕분에 1등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결승선을 앞두고 나는 순간 고꾸라져버렸다.
신발끈이 느슨해진 상태였던 것을 잘 확인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이었다.
그렇게 우리 중대는 패자의 불명예를 안으며 체육대회는 마무리되었다.
패배를 가져왔다는 씁쓸함을 200원짜리 자동판매기 설탕커피로 달래며, 평소와 특별히 다를 것 없는 저녁 일과를 마무리했건만.
다음 날 아침 나는 무릎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체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하면 하루나 이틀 뒤에 멍이 들고 그제서야 어, 아프다 하던 이상한 체질이었는데,
아마 전날 고꾸라지면서 왼쪽 무릎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잘 달릴 수 없을 것이라는 뇌내 망상과, 부상으로 인한 조기 제대가 불가피할 것 같다는 뇌피셜에 사로잡혀 두려움 반, 설렘 반 섞인 야릇한 기분에 취한 것도 잠시.
나는 그 흔한 외래진료 한 번 다녀오지도 못하고 사흘만에 완전 회복했다. 난 무지 건강한 놈이었다.
남은 군생활 동안 꿀 한 번 빨아보겠다는 욕심은 일찍이 물 건너갔지만, 달리는 동안 발을 뻗는 순간에 좀 더 집중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일 것이다.
제대 후 나는 여름 내내 묵혀둔 깔깔이 같은 군바리 냄새를 채 지우지도 못하고, 대학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배정받은 기숙사는 답답하고 외로운 공간이었지만 가까운 곳에 육상 트랙이 있다는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매일 새벽 곧게 그려진 트랙 라인 위를 달리며
내 하루 또한 틀어지는 일 없이 곧게 그려질 수 있도록 마음을 정비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전공을 살려 의류회사 디자인실 소속의 소재 담당자로 취업했다.
전공지식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의류 제조 기업 소재실의 특성 상 무겁고 커다란 원단을 옮겨야 할 일이 많았기에
나와 내 동료는 매일같이 녹초가 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맥주 한 잔에 지친 몸을 누이고, 다시 눈을 뜨면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서러운 일상이자 깊은 애환이었다.
커다란 탑차 안에 가득 우겨진 원단들이 입고되는 날이면, 미리 밖으로 나가 배송 차량이 들어오길 기다리곤 했는데
매번 비슷한 시간에 멋드러진 스포츠 선글라스를 끼고 회사 앞을 달리는 아저씨를 보게 되는 일도 잦았다.
그 어르신을 보는 날이면
내가 마지막으로 뛰어 본 게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
출근 전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하철 출입구 계단을 달려가는 것 말고,
기분 좋게 땀 흘리고 바람 마셔가며 뛰어 본 적이 언제였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직장 생활에 아주 많이도 지쳐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전우였던 사수마저 곧 퇴사해버렸다. 대체 인력이 쉽게 구해지지 않아 나는 홀로 남겨진 채로 둥글게 잘 말려진 원단 기둥들과 씨름해야 했다.
실수 또한 많아지기 시작했다. 원단 사용량을 체크하는 부분에서 특히 실수가 잦았고.
발주를 깜박하는 일도 간혹 생기기 시작했다.
단거리 경주만큼이나 빠른 스피드를 내는 것이 중요하던 의류 생산업계에서 '빵꾸'가 난다는 건 아주 큰일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나는 과장님 앞에 불려가고 말았다.
일 잘 하고 정 안 주는, 차갑기로 유명했던 무서운 여과장님.
오늘 혼쭐 한 번 제대로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거짓말처럼 차분한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호수 같은 목소리와는 달리 과장님의 얼굴은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표정이었기에 난 더더욱 긴장해야했다.
생각해보면 과장님의 표정은 언제나 솔직했다.
이미 윗선에서 줄기차게 갈굼 당하고 오셨겠지.
"민욱씨"
"혼자 큰 일하고 있는 거 나도 잘 아는데."
"어려울 땐 얘기해요. 한 숨 돌리게 해 줄 테니까."
"실수는 다시 잡을 수 있어."
과장님의 덤덤했지만 따뜻한 목소리에 한껏 울컥해지는 순간이었다.
"머리 복잡하면 나가서 근처 한 바퀴라도 뛰고 와요."
…뛰고 와요..
그토록 반가운 소리를 저 과장님에게서 듣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과장님, 죄송하지만 말씀 다 끝나신 거면“
"알았어. 끝났으니까 나가도 돼요."
"그게 아니고...잠깐 뛰고 오려구요."
나는 테헤란로를 정신없이 달렸다.
화의실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가기 전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과장님의 표정을 확인할 용기는 차마 없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나는 사내 체육대회 계주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고 행복하게 달렸다.
그 날의 과장님은 나를 향해 웃고 계셨다.
테헤란로 질주 사건 이후 '런닝맨'이라는 특별한 별명을 얻은 나는 회사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아무리 어렵고 속상하고 힘들어도, 내가 달릴 수 있는 여유를 찾아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연을 가진 별명 때문에 몇몇 동료 여직원들의 호기심이 나를 향해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리 속엔 과장님을 향해 달려가는 상상만이 펼쳐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야근을 하고 계시던 과장님께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저, 과장님하고 식사 한 끼 하고 싶습니다.
사석에서요.”
짧았는지, 길었는지도 모를 정적이 지나가고
과장님은 내가 지금껏 본 표정 중 가장 예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과장님과의 데이트가 성사되었느냐?
하..
크리스마스 이브의 몽글몽글한 분위기에 힘입어
시원하게 내 마음을 고백했지만
나는 더더욱 시원한 성격의 과장님께 차이고 말았다.
유쾌하고 러블리한 스토리의 드라마가 펼쳐지길 소망했으나
리얼 휴먼 다큐도 아닌, 누군가의 무미건조한 브이로그 정도로 끝나버린 하루였다.
불교 방송처럼 고요하고 기독교 방송처럼 거룩한 밤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달리기로 해소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뛰기 싫은 날도 있는 법이니까.
그 후론 어떻게 됐냐고?
나는 한참이나 정들었던 회사를 떠나
스포츠 용품 판매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설마 실연당한 것 때문에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창업은 내가 오래 전부터 도전하고 싶어했던 일이고,
사랑에 실패했다고 모든 걸 던져버리는 놈이라면
과장님은 물론 스스로를 볼 낯이 더욱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저 아주 멋진 사람이 내 상사였음에 감사하고, 나 역시 더욱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달려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뛰는 놈 위의 나는 놈은 아니더라도
꿈꾸는 놈이 될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꿈을 위해 달리다 보면
언젠가 과장님께 내 호흡이 들리게 될지도 모르지.
일이 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고
계획보다 근심이 가득할 때,
비록 느릴지라도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달리기를 통해 배워나가는 중이다.
1등이 아니라도 좋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과 감동이 가득한 마라톤 같은 삶이 있으니까.
두 다리로 땅을 박차고 달려가는 순간이
작은 신체 하나가 커다란 지구를 두드리는 기적이라 생각하면 크나큰 용기가 솟아난다.
지난 날들은 Ready,
오늘은 Get set,
내일은 Go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내일을 달리는 런닝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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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 2024.03.01 | 5 | 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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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유로운 주제로 글을 쓰실 수 있는 자유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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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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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 2023.12.26 | 0 | 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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