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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 위 도달하지 못한 사랑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지수
작성일
2024-02-29 17:40
조회
82
난 육상이 좋았다.
발로 땅을 누르고, 바람을 가르며, 누구보다 앞서 나가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사실은 그 순간 보다 그 애를 사랑했던 것 같다. 처음 육상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 애 때문이었으니까.
그 애와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입학식이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 애는 이미 다른 아이들과 친해져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다른 반이었지만 그 애의 반을 지나칠 때마다 약간씩 기웃거렸다. 그러다 체육대회 학년 계주를 뽑는 날이 다가왔다. 각자의 반에서도 계주를 뽑는데 운 좋게 우리 반에서는 내가, 그 애 반에서는 그 애가 계주가 되었다. 계주들끼리 모여서 연습을 하는데 그 때 그 애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름, 반, 키, 혈액형 등등… 정말 어렸던 탓에 어린 애들이나 하는 얘기를 나눴지만 그것마저 행복한 대화였다. 몇 번이고 연습하고 뛰어서 잔뜩 지쳤지만 나보다 앞서가는 그 애를 보니 포기할 수 없었다.
몇날 며칠 연습한 끝에 난 그 애를 제칠 수 있었다. 그리고 체육대회가 다가왔다. 여러 종목들을 한 후, 마지막 순서이자 체육대회의 꽃인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그 애는 잔뜩 긴장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네가 제일 빠르니까 걱정말라고 격려해줬다. 내 순서가 다가오고 난 전력을 다 해 달렸다.
수많은 인파, 내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친구들, 잘한다며 응원하는 언니오빠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애가 보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가 날 극한으로 몰아 붙였고 난 그 애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빠졌다. 운동장 바닥에 엎어졌지만 그 애가 달리는 장면을 놓칠 수 없어 다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그 날 우리가 속한 팀이 우승했다. 그 애는 날 향해 달려와 나를 안아주며 잘했다고, 우리 팀이 이겼다고 좋아했다. 그 때 날 안으며 좋아하는 그 애로 인하여 더 달리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집에 가서 육상 대회 영상들을 찾아봤다. 어린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성인 선수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빨리 달려서 금메달을 가진다면 그 애가 날 좋아하지 않을까. 어렸던 난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때부터 집에 갈 때나, 학원에 갈 때, 학교에 갈 때 일부러 달렸다. 방과후에 시간이 남으면 운동장에서 몇 바퀴씩 뛰고 갔다. 그러면 더 빨라질거라 여겼으니까. 계속 뛰어서인지 그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체육대회 때 계주를 할 수 있었다. 내가 계주를 할 때마다 그 애도 항상 계주를 해서 좋았다. 그 애와 같이 달리며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내 기쁨이였다.
그러다 내가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나는 달리지 않았다. 계주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없으니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난 육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를 사랑했던 거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전에 다닌 학교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그리워하던 학교에 갔다. 학교 놀이터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푸는데 운동장에 어떤 남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니 친구들이 뭘 그리 보냐 물었다. 내 시선 끝에 있는 애를 보고는 친구들은 그 애가 맞다며 말했다.
역시나. 내가 사랑했던 그 애구나.
친구들은 내 손목을 끌어 그 애에게 갔다. 그 애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용케도 기억을 했다. 그 애와 얘기를 하다 육상 얘기가 나왔다. 자기는 여전히 계주를 하는데 넌 어떻냐는 그 애의 질문에 거짓말을 했다. 나도 여전히 계주라고. 오랜만에 달려보자는 말에 빨간 트랙 위에서 다시 한 번 달렸다.
지는 노을, 푸른 잎들, 시원한 바람까지.
마치 처음 그 애와 달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애는 나보다 앞서 나가 멀어지고 있었다. 전처럼 나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달렸지만 멀어졌다. 그 때 난 내 마음이 닫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네에 며칠 동안 있으면서 그 애와 저녁에 산책한 적도 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느꼈다. 이렇게 바로 옆에서 걸어도 닿지 않는 내 마음이 달린다고 해서 닿을까. 그 애는 이미 나보다 앞에 있고 더 이상 따라 잡을 수가 없는데.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정말로 마음에서 육상을 보내줬다. 그 애도 내 마음에서 보내줬다. 걸어도 닿지 않는데 뛴다고 되겠는가. 난 이미 발목이 자주 아플 정도로 달렸고, 다리 근육에 쉽게 염증이 생길 정도인데 어떻게 더 뛰겠는가. 그냥 보내줘야겠지.
육상도, 내 사랑도 결승선에 도달하지 못한 채 트랙 위에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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