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완전히 축구를 잊었다고 생각할 무렵, 내게 새로운 공이 굴러들어왔다.
이벤트/백일장
작성자
현송이
작성일
2024-03-01 00:26
조회
282
견디기 힘들었다. 열다섯에 나에게 닥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가는 찬란한 미래와 지금의 꿈을 지켜보는 것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일들보다도 가혹했다.
7살. 흐릿하게 나마 기억나는 그때의 추억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또렷이 내 눈앞에 숨 쉬고 있는 광경이 하나 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눈물에 콧물에 하여튼 온 몸으로 아쉬움을 내뿜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내가 입학해야 할 초등학교가 보였고, 엄마의 권유에 따라 교문을 넘어 드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 머리보다 조금 커 보이는 공 하나에 우리 반 애들보다도 더 많아보이는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 매서운 겨울날에도 그들은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공을 쫓기에 바빴다. 아무리 뛰어다니던 중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 때문에 입에서 김이 폴폴 베어나오고 있었음에도, 곡소리와 함께 무릎을 짚고 멈춰서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한 가지에 매료되어 그리도 행복한 모습으로 모여있는 광경을 바라본 것은.
나도 모르게 눈을 빼앗겨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명랑하게 말씀하셨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너도 저거 한 번 해볼래?”
그때부터 내 인생에 축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에게도 마지막이 찾아왔고, 쌀쌀맞던 날씨는 금세 포근해져 내게 상냥하게 굴었다. 푸릇푸릇한 봄과 함께 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담임 선생님을 붙잡고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비록 엘리트 축구 선수를 기르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아마추어임에도 다른 엘리트 선수들 못지 않은 지원과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축구를 마주했던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아빠와 하루 종일 축구만 했다. 폐가 찢어질 듯이 아파와도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 주저앉아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만 보고 달렸다. 골대 쪽으로 볼을 힘껏 걷어차 그물이 철썩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말주변이 없어 더는 표현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축구를 좋아했다. 잔디 하나 없이 흙먼지만 날리던 운동장에서 아빠와 단 둘 뿐이서 즐겼던 축구도 나를 이렇게나 미치게 만들었는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필드 위에서 내 또래 아이들과 팀을 이뤄 즐기는 축구가 날 매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은 필드 위에서만 흘러갔다.
다섯 번에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찾아올 무렵, 초등학교도 졸업할 시즌이 되어 감독님과 진지한 면담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즐겼던 지난 6년과는 달리, 이제는 나도 선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를 할 것인지, 정말 진지하게 축구를 업으로 삼고 나아갈 마음을 먹을 것인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때에 난 머릿속에 축구밖에 없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당시 축구부에 있던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 중 나 같은 선택을 하는 부원이 많았을 거라는 건 순진했던 어린 나의 착각이었다. 몇몇은 지금까지 축구나 하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씁쓸한 미소로 날 보내주었다. 이제 겨우 열 네 살밖에 안 먹은 것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어른인 것 마냥 구는 걸까 싶어 그때는 짜증만 났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초등학교 때 같이 뛰었던 친구들을 먼저 교실로 돌려보내고 필드 위에 남았다.
감독님이 정말 힘을 많이 써주셨는지 난 엘리트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수를 막론하고 뛰고 싶은 대로 뛰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젠 철저히 포지션에 맞춰 훈련하고 경기를 뛰었다. 아, 경기를 뛰었다는 말은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 늘 나이 순으로 치러지는 주전 경쟁에 엘리트 스포츠를 처음 경험해보는 1학년 따위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2학년 때부터 주전을 달아 경기에 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였나, 부원이었나? 아무튼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남아있을 정도의 생기를 갖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 뿐이다. 쟤는 축구를 저렇게 잘하니까 분명 행복하겠지. 경기를 뛰면서 살아있는 기분을 마음껏 느끼겠지. 물어보지도 못할 망상만 가슴에 품고 훈련에 들어갔다. 나도 나름 공 좀 차봤다고 하고 싶은데 거기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열 네 살 짜리 애들한테 6년이란 시간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가거나 뒤도 쫓지 못 할만큼 벌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3학년이 되면 주전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학년 1학기 중간 평가에서 나는 여덟 명의 2학년 부원들 사이에서 4등을 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밥만 먹고 훈련에 들어가면 3학년 때 주전 자리는 금세 따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희망에 가득 찬 상태로 열심히 뛰었다. 내가 어딜 향해 뛰고 있는지도 모른 채.
1학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끈적하게 공기가 들러붙는 여름이 찾아왔을 때, 우리 축구부는 해체되었다. 성적을 못냈다거나, 하는 이유였다면 억울하지는 않았을텐데, 이 축구부의 마지막은 그렇게 낭만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해체한 이유는 감독의 주머니 속에 있던 썩어 문드러진 돈 때문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축구부운영회비라는 이름으로 손 안에 거머쥔 그 돈으로 헛 짓을 참 많이도 해왔다더라. 차라리 돈만 빼돌리지 왜 그 코찔찔이들 돈을 뒷골목에 썼는지, 감독에게 살의를 담은 원망을 품었다. 감독의 뻘 짓이 얼마나 창대했는지, 한 번도 기사에 올라간 적 없던 우리 학교 이름이 떡하니 신문 1면에 떴다. 인터넷 기사에서 스포츠 부분을 누르면 뜨는 화면에도 우리 학교 이름이 가장 크게 쓰여있었다. 학부모와 교장의 항의로 곧 알파벳 하나로 이름이 대체되었지만. 그때 쯤 가서는 부원들도 하나같이 의욕을 잃은 채 두 부류로 나뉘었다. 지금이라도 이 거지 같은 학교를 탈출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 3학년 때 주전을 꿰차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진 학생과, 어차피 고등학교까지도 못해볼 축구, 이만치 했으면 많이 했다 생각하고 그만두는 학생 둘이 부원들을 어찌저찌 설득해 갈라섰다. 나야 당연히 처음엔 전자쪽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래도 2학년 들어서 경기를 아예 안 뛴 건 아니었으니까 전국을 다 뒤지면 날 들여보내 줄 축구부가 하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그건 그냥 자길 너무 대단하게 바라보던 열다섯의 치기일 뿐이었다. 고작 여덟 명 중에서 간신히 중간을 지키던 나에겐 전학, 어쩌면 이사까지 해가면서 받아줄 학교도, 그걸 지원해줄 가정도 없었다. 우리 아빠는 날 처음 축구부에 입부시켰던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 맞는지, 그따위 공놀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나무랐다. 엄마도 아닌 척 위로했지만 실은 내가 축구를 그만두길 원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열다섯의 여름에 나는 축구화를 내다 버렸다.
이리 쉽게 말했지만 이때의 나는 속이 곪아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축구를 빨리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축구만이 가득 차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내 다리는 항상 골대를 향해 달렸다. 다른 목표 따위, 쳐다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축구를 해보고 싶었는데. 고등학교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 부원들, 아니 이 친구들과 열심히 뛰어 중학교 때 트로피 하나 정도는 들어보고 싶었는데. 미련이 남지 않을 리 없었다. 내가 선택한 끝이 아니라 강제로 끝나버린 길의 끝에서 나는 하염없이 절벽 아래만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꿈꾸던 미래는 그렇게 산산 조각났다.
축구화를 내다 버리려고 들고 나간 그날, 우리 집 맞은 편에 살던 후배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 비록 후보였지만 팀은 우승도 해보고, 그때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은 스카웃까지 되었다던 학교 출신이었다. 딱 봐도 작년의 나보다 실력도 훨씬 좋아보였다.
그랬던 애였는데, 그 애의 어깨에도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축구화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나오자마자 눈을 마주친 이후로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축구를 그만 두려나보다, 하고. 축구화를 버린 후에도 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그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걔도 나름 축구를 많이 사랑했을텐데, 어쩌면 나보다도 더 축구에 미쳐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 한들 이미 해체되어 버린 축구부를 아득바득 붙잡고 있는 사람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주전이나 실력 좋다고 소문 좀 났던 애들은 다른 중학교에서 거의 모셔가듯이 대려갔다던데, 우리한테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 찾아가서 치뤘던 오디션도 줄줄이 떨어졌다. 이때 즈음에는 머리도 좀 식게 된 것 같았다. 사실 축구는 이미 날 놔줬는데 내가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게 아닌가, 하고.
그날 적어도 30분은 나란히 계단에 걸터앉아 하늘만 바라봤던 것 같다. 선배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명언이나 가슴 한 켠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말 따위는 해주지 못했지만 내 딴에는 진심을 담은 말만 꺼내려고 노력했었다. 내용이 기억도 안나는 걸 보면 쓸 때 없는 말만 잔뜩한 것 같지만. 축구화를 버리러 집 밖에 나온 지 꼬박 한 시간 만에 내 모든 진심이 쓰레기장 앞에서 후배를 거쳐 흩날려가고, 내 미련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때 뭐라고 하면서 헤어졌더라. 내용은 기억도 안 날만큼 흐릿하지만 엄청 집착하다 헤어진 전남친같은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는 것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진짜 내 축구가 끝이 났다. 마침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로 접어들기 직전이던 무렵에.
아무리 축구를 그만두고 필드에 다시는 올라서지 않았다 해도 완전히 축구에게서 벗어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후배와 그렇게 헤어지며 축구화를 버린 날로부터 꼬박 2년동안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삶 속에서 축구를 지워나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축구부가 있다는 말에 운동장 쪽은 바라보지도 않으려 노력했다. 한때 내가 그리도 미쳐있었던 걸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다시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딴식으로 미련하게 굴었던 것 같다. 역시 무식한 방법이 제일 나았던 건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다시 찾아온 여름에 축구는 들어있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난 공에 미쳐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축구를 잊었다고 생각할 무렵, 내게 새로운 공이 굴러들어왔다.
2학기를 맞아 동아리를 다시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교실로 들어오신 체육선생님은 다짜고짜 칠판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구부’
투박하게 쓰여진 세 글자가 내 가슴에 단단히 박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동아리 정정 기간인 거 알지? 우리 학교에는 축구부만 있는 게 아니다! 실외 스포츠가 있으면 실내 스포츠도 있어야지! 다들 배구는 알고 있나? 우리 학교 배구부는 비록 창설된 지는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마추어 동아리 중에서는 실적도 좋은 편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방과 후에 체육관으로 오도록!”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체육 선생님은 자신의 할 말만 대뜸 하고는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말 실수를 할까 봐 너무 긴장한 탓에 질문도 안 받고 그냥 나와버린 것이었단다.
어쨌든, 배구부 같은 게 있었냐, 배구 해서 뭐하냐는 반응들 사이로 나는 새로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배구, 해보고 싶다.
물론 배구라는 종목 자체가 좋아서 하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놀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줄 또 다른 구기 종목이 있다는 것에 기뻤을 뿐이었다. 배구라고 하면 여자 배구, 것도 김연경만 간신히 알고 있던 내가 뭘 알고 배구를, 배구부를 사랑했겠는가. 친구들이 노골적으로 내뱉는 의외라는 시선 사이로 배구부 입부 신청서를 받아 들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디션을 보면 어떡하지? 배구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라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체육 선생님, 아니 코치님은 누가 봐도 반가운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게 코치님 방식의 악수라는 건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코치님은 내가 배구를 처음 해본다는 말을 듣고 나서도 마냥 해맑은 얼굴이었다. 코치님은 나를 쭉 한 번 훑어보더니 아주 훌륭한 몸이라면서 냅다 입부신청서에 싸인부터 하라며 펜을 쥐어주었다. 그때 입부신청서를 들고 체육안전부 교무실로 들어가던 코치님의 표정은 마치 노예 계약을 성사 시킨 악덕업주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배구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7살. 흐릿하게 나마 기억나는 그때의 추억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또렷이 내 눈앞에 숨 쉬고 있는 광경이 하나 있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눈물에 콧물에 하여튼 온 몸으로 아쉬움을 내뿜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내가 입학해야 할 초등학교가 보였고, 엄마의 권유에 따라 교문을 넘어 드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 머리보다 조금 커 보이는 공 하나에 우리 반 애들보다도 더 많아보이는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그 매서운 겨울날에도 그들은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공을 쫓기에 바빴다. 아무리 뛰어다니던 중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추위 때문에 입에서 김이 폴폴 베어나오고 있었음에도, 곡소리와 함께 무릎을 짚고 멈춰서게 되었음에도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한 가지에 매료되어 그리도 행복한 모습으로 모여있는 광경을 바라본 것은.
나도 모르게 눈을 빼앗겨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명랑하게 말씀하셨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너도 저거 한 번 해볼래?”
그때부터 내 인생에 축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에게도 마지막이 찾아왔고, 쌀쌀맞던 날씨는 금세 포근해져 내게 상냥하게 굴었다. 푸릇푸릇한 봄과 함께 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담임 선생님을 붙잡고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애원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비록 엘리트 축구 선수를 기르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아마추어임에도 다른 엘리트 선수들 못지 않은 지원과 환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축구를 마주했던 그 날 이후 매일같이 아빠와 하루 종일 축구만 했다. 폐가 찢어질 듯이 아파와도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당장 주저앉아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만 보고 달렸다. 골대 쪽으로 볼을 힘껏 걷어차 그물이 철썩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말주변이 없어 더는 표현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축구를 좋아했다. 잔디 하나 없이 흙먼지만 날리던 운동장에서 아빠와 단 둘 뿐이서 즐겼던 축구도 나를 이렇게나 미치게 만들었는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는 필드 위에서 내 또래 아이들과 팀을 이뤄 즐기는 축구가 날 매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은 필드 위에서만 흘러갔다.
다섯 번에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찾아올 무렵, 초등학교도 졸업할 시즌이 되어 감독님과 진지한 면담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즐겼던 지난 6년과는 달리, 이제는 나도 선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를 할 것인지, 정말 진지하게 축구를 업으로 삼고 나아갈 마음을 먹을 것인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때에 난 머릿속에 축구밖에 없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당시 축구부에 있던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 중 나 같은 선택을 하는 부원이 많았을 거라는 건 순진했던 어린 나의 착각이었다. 몇몇은 지금까지 축구나 하고 있을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씁쓸한 미소로 날 보내주었다. 이제 겨우 열 네 살밖에 안 먹은 것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어른인 것 마냥 구는 걸까 싶어 그때는 짜증만 났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초등학교 때 같이 뛰었던 친구들을 먼저 교실로 돌려보내고 필드 위에 남았다.
감독님이 정말 힘을 많이 써주셨는지 난 엘리트 축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수를 막론하고 뛰고 싶은 대로 뛰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젠 철저히 포지션에 맞춰 훈련하고 경기를 뛰었다. 아, 경기를 뛰었다는 말은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 늘 나이 순으로 치러지는 주전 경쟁에 엘리트 스포츠를 처음 경험해보는 1학년 따위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2학년 때부터 주전을 달아 경기에 나가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였나, 부원이었나? 아무튼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남아있을 정도의 생기를 갖고 있는 감정은 단순한 부러움 뿐이다. 쟤는 축구를 저렇게 잘하니까 분명 행복하겠지. 경기를 뛰면서 살아있는 기분을 마음껏 느끼겠지. 물어보지도 못할 망상만 가슴에 품고 훈련에 들어갔다. 나도 나름 공 좀 차봤다고 하고 싶은데 거기서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열 네 살 짜리 애들한테 6년이란 시간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가거나 뒤도 쫓지 못 할만큼 벌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3학년이 되면 주전에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학년 1학기 중간 평가에서 나는 여덟 명의 2학년 부원들 사이에서 4등을 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밥만 먹고 훈련에 들어가면 3학년 때 주전 자리는 금세 따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희망에 가득 찬 상태로 열심히 뛰었다. 내가 어딜 향해 뛰고 있는지도 모른 채.
1학기가 거의 다 끝나가고, 끈적하게 공기가 들러붙는 여름이 찾아왔을 때, 우리 축구부는 해체되었다. 성적을 못냈다거나, 하는 이유였다면 억울하지는 않았을텐데, 이 축구부의 마지막은 그렇게 낭만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해체한 이유는 감독의 주머니 속에 있던 썩어 문드러진 돈 때문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축구부운영회비라는 이름으로 손 안에 거머쥔 그 돈으로 헛 짓을 참 많이도 해왔다더라. 차라리 돈만 빼돌리지 왜 그 코찔찔이들 돈을 뒷골목에 썼는지, 감독에게 살의를 담은 원망을 품었다. 감독의 뻘 짓이 얼마나 창대했는지, 한 번도 기사에 올라간 적 없던 우리 학교 이름이 떡하니 신문 1면에 떴다. 인터넷 기사에서 스포츠 부분을 누르면 뜨는 화면에도 우리 학교 이름이 가장 크게 쓰여있었다. 학부모와 교장의 항의로 곧 알파벳 하나로 이름이 대체되었지만. 그때 쯤 가서는 부원들도 하나같이 의욕을 잃은 채 두 부류로 나뉘었다. 지금이라도 이 거지 같은 학교를 탈출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 3학년 때 주전을 꿰차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진 학생과, 어차피 고등학교까지도 못해볼 축구, 이만치 했으면 많이 했다 생각하고 그만두는 학생 둘이 부원들을 어찌저찌 설득해 갈라섰다. 나야 당연히 처음엔 전자쪽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그래도 2학년 들어서 경기를 아예 안 뛴 건 아니었으니까 전국을 다 뒤지면 날 들여보내 줄 축구부가 하나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그건 그냥 자길 너무 대단하게 바라보던 열다섯의 치기일 뿐이었다. 고작 여덟 명 중에서 간신히 중간을 지키던 나에겐 전학, 어쩌면 이사까지 해가면서 받아줄 학교도, 그걸 지원해줄 가정도 없었다. 우리 아빠는 날 처음 축구부에 입부시켰던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 맞는지, 그따위 공놀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며 나무랐다. 엄마도 아닌 척 위로했지만 실은 내가 축구를 그만두길 원하고 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열다섯의 여름에 나는 축구화를 내다 버렸다.
이리 쉽게 말했지만 이때의 나는 속이 곪아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축구를 빨리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축구만이 가득 차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내 다리는 항상 골대를 향해 달렸다. 다른 목표 따위, 쳐다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축구를 해보고 싶었는데. 고등학교까지는 못 가더라도 이 부원들, 아니 이 친구들과 열심히 뛰어 중학교 때 트로피 하나 정도는 들어보고 싶었는데. 미련이 남지 않을 리 없었다. 내가 선택한 끝이 아니라 강제로 끝나버린 길의 끝에서 나는 하염없이 절벽 아래만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꿈꾸던 미래는 그렇게 산산 조각났다.
축구화를 내다 버리려고 들고 나간 그날, 우리 집 맞은 편에 살던 후배를 만났다. 초등학교 때 비록 후보였지만 팀은 우승도 해보고, 그때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은 스카웃까지 되었다던 학교 출신이었다. 딱 봐도 작년의 나보다 실력도 훨씬 좋아보였다.
그랬던 애였는데, 그 애의 어깨에도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축구화가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나오자마자 눈을 마주친 이후로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 알 수 있었다. 이제 축구를 그만 두려나보다, 하고. 축구화를 버린 후에도 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그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걔도 나름 축구를 많이 사랑했을텐데, 어쩌면 나보다도 더 축구에 미쳐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 한들 이미 해체되어 버린 축구부를 아득바득 붙잡고 있는 사람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주전이나 실력 좋다고 소문 좀 났던 애들은 다른 중학교에서 거의 모셔가듯이 대려갔다던데, 우리한테는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심지어 찾아가서 치뤘던 오디션도 줄줄이 떨어졌다. 이때 즈음에는 머리도 좀 식게 된 것 같았다. 사실 축구는 이미 날 놔줬는데 내가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게 아닌가, 하고.
그날 적어도 30분은 나란히 계단에 걸터앉아 하늘만 바라봤던 것 같다. 선배의 노련미가 돋보이는 명언이나 가슴 한 켠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말 따위는 해주지 못했지만 내 딴에는 진심을 담은 말만 꺼내려고 노력했었다. 내용이 기억도 안나는 걸 보면 쓸 때 없는 말만 잔뜩한 것 같지만. 축구화를 버리러 집 밖에 나온 지 꼬박 한 시간 만에 내 모든 진심이 쓰레기장 앞에서 후배를 거쳐 흩날려가고, 내 미련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그때 뭐라고 하면서 헤어졌더라. 내용은 기억도 안 날만큼 흐릿하지만 엄청 집착하다 헤어진 전남친같은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는 것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진짜 내 축구가 끝이 났다. 마침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로 접어들기 직전이던 무렵에.
아무리 축구를 그만두고 필드에 다시는 올라서지 않았다 해도 완전히 축구에게서 벗어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후배와 그렇게 헤어지며 축구화를 버린 날로부터 꼬박 2년동안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삶 속에서 축구를 지워나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축구부가 있다는 말에 운동장 쪽은 바라보지도 않으려 노력했다. 한때 내가 그리도 미쳐있었던 걸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다시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딴식으로 미련하게 굴었던 것 같다. 역시 무식한 방법이 제일 나았던 건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다시 찾아온 여름에 축구는 들어있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난 공에 미쳐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축구를 잊었다고 생각할 무렵, 내게 새로운 공이 굴러들어왔다.
2학기를 맞아 동아리를 다시 신청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우렁찬 인사와 함께 교실로 들어오신 체육선생님은 다짜고짜 칠판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구부’
투박하게 쓰여진 세 글자가 내 가슴에 단단히 박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동아리 정정 기간인 거 알지? 우리 학교에는 축구부만 있는 게 아니다! 실외 스포츠가 있으면 실내 스포츠도 있어야지! 다들 배구는 알고 있나? 우리 학교 배구부는 비록 창설된 지는 3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마추어 동아리 중에서는 실적도 좋은 편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방과 후에 체육관으로 오도록!”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체육 선생님은 자신의 할 말만 대뜸 하고는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말 실수를 할까 봐 너무 긴장한 탓에 질문도 안 받고 그냥 나와버린 것이었단다.
어쨌든, 배구부 같은 게 있었냐, 배구 해서 뭐하냐는 반응들 사이로 나는 새로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배구, 해보고 싶다.
물론 배구라는 종목 자체가 좋아서 하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그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놀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줄 또 다른 구기 종목이 있다는 것에 기뻤을 뿐이었다. 배구라고 하면 여자 배구, 것도 김연경만 간신히 알고 있던 내가 뭘 알고 배구를, 배구부를 사랑했겠는가. 친구들이 노골적으로 내뱉는 의외라는 시선 사이로 배구부 입부 신청서를 받아 들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디션을 보면 어떡하지? 배구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라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체육 선생님, 아니 코치님은 누가 봐도 반가운 얼굴로 내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게 코치님 방식의 악수라는 건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지만. 코치님은 내가 배구를 처음 해본다는 말을 듣고 나서도 마냥 해맑은 얼굴이었다. 코치님은 나를 쭉 한 번 훑어보더니 아주 훌륭한 몸이라면서 냅다 입부신청서에 싸인부터 하라며 펜을 쥐어주었다. 그때 입부신청서를 들고 체육안전부 교무실로 들어가던 코치님의 표정은 마치 노예 계약을 성사 시킨 악덕업주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배구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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